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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Feb 11. 2022

'사료'와 '식사'

'먹는다'는 고귀한 행위에 대하여

혼자 사는 연예인들을 모아서 관찰 예능을 하는 M사의 어느 유명한 프로의 초기 시절, 그들은 그 회원들을 모아서 워크숍을 갔었던 에피소드가 있다. 그들은 어느 대학교의 유명한 철학과의 모 교수님을 초빙해서 강연을 들었는데, 주요 논제는 '사료와 식사'였다. 가축이 먹는 것을 '사료는 먹는다'라고 하며,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을 '식사를 한다'라고 표현한다.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먹는다는 의미는 같은 것이지만, '사료'와 '식사'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 정리를 해드리자면, 음식을 대충대충 해서 먹기 위해서만 반찬을 한 곳에 막 비비고, 숟가락을 꽂아서 먹는 식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사료', 귀찮지만 정성이 담긴 여유로운 마음으로 잘 차려서 흐뭇하게 서로 혹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고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식사'라고 설명을 하였다. 그 프로그램의 이름답게 평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지를 자문해보는 시간이었다, 음식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마음이 큰 울림을 주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다.


단세포 미생물부터 복잡한 구조를 가진 인류까지, 모든 생물은 무언가를 섭취하고 그로부터 양분을 얻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의 그 '섭취'는 무언가 다르다. 그저 음식을 날로 섭취하기보다는 더 영양가 있고, 원재료가 갖고 있는 풍미를 극대화시키는 가공방식을 통하여, 미관에도 좋은 모습으로 꾸며 정갈한 식기를 사용하여 먹게 된다. 양은냄비에 젓가락, 김치를 썰어서 먹는 간단한 한 끼의 라면이라도 할지라도 선사시대 인류가 음식을 먹던 방법에 비하면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우리는 먹는다.


나는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재료를 여러 가지 요리과정과 사용하기 편안한 식기에 차려 먹는 것은 인류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일 의식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그것이 꼭 타인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그 의식은 누군가를 소중히, 귀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음식이나 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그것도 오랫동안 섭취하지 않으면, 누구나 삶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된다.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는 생명유지, 삶을 이어나가는 행위이며 그렇기에 삶을 살기 위한 투쟁의 일부이다.


오지에 홀로 남겨졌거나, 전쟁 중이거나, 너무나도 힘든 작업 중 점심시간이거나, 그럴 때에는 대단히 차려서 먹을 정신도 없고 이것저것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하기에 대충 먹게 되어서 위의 철학자의 말대로 '사료'를 먹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 이러한 식사시간에 먹게 되는 음식을 '사료'로 부르는 것에 다른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음식 그 자체에 '그저 먹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는 가치를 담아 먹는다면 그것은 '사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힘든 육체적 노동 중, 힘든 훈련 중, 극한의 재난 상황 등, 어떠한 힘든 상황에도 식사는 소중하고 감사한 것이다. 얼굴에 흙먼지와 흑검댕등을 덕지덕지 묻히고 먹는 비닐봉지에 쌓인 주먹밥일지라도, 요리한지는 오래되어 냉장고에서 대충 가져온 소박한 반찬을 떄려넣고 비벼먹는 양푼비빔밥일지라도, 군부대에서 먹는 양철 식판에 담아먹는 된장국과 짬밥일지라도. 그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 시장을 반찬으로 삼아서 먹는 감동, 그 식사로 인하여 계속해서 힘을 내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대충 라면 반 조각에 밥숟가락을 꽂아서 먹는다고 하더라도 먹는 삶에 대한 집착과 애증, 그 외에 말로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담기는, 우리 스스로와 타인이 해당 음식에 갖는 마음들 하나, 하나가 '사료'를 '식사'로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식사'라는 단어를 '사료'라는 단어와 구분하는 이유는 '식사'에는 '대충'과 '그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해서 차리는 밥이라도,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님이 차려주는 밥이라도, 식당과 카페에서 돈을 지불하고 대가로 얻는 차려진 식사 한 끼 혹은 간식이라도, 그것에는 그저 삶을 연명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과 시간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사람 혹은 사람들과 함께 그 '섭취'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저 '삶'을 위해서가 아닌 '배려', '쾌락'과 '행복감'이 '식사'에 담겨있다. '사료'는 먹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부여하여 '식사'로 여길 수 있지만, '식사'는 이미 사람을 위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이 차이다.


그래도, '사료'이든 '식사'이든 그것들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그 자체로, 생명을 위한 것이기에 거룩하게 여겨져야 하며 적어도 그 행위를 하는 시간 동안에는 누구도 건드리면 안 되는 '거룩한 의식'으로 여겨져야 한다. 하늘에서 부여된 삶을 이어갈 권리를 누구도 방해할 수는 없다. 한국 관용어에도 '밥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 걸 보니, 한국인들은 먼 과거에서부터 밥에 진지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밥을 먹는다는 것이 거룩한 의식이고 불가침의 영역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은 민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래서, 누군가 식사시간에 혼이 난다면 측은한 것이고, 밥 먹는 시간을 방해해서라도 법의 응징과 심판을 받는다면 (식사시간을 급습한 범죄자 체포 등),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할 정도로 악한 인간일지도.


아래는 오늘 이쁜 여자와 점심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중 일부:



이쁜 여자 왈 "겨우살이 차는 맛이 참 달더라"



내가 잠시 정적 후 웃자, 그녀 말한다.



"왜 웃어?"



나는 답했다,



"겨우 살던 빌어먹고 살던, 어쨌든 다 이겨내고 사니까 그 맛이 참 달달한 거야."



겨우살이라는 식물은 '겨울'에 다른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식물이라 혼자서 겨우 살아남는 그런 식물은 아니다. 종에 따라서 기생도 하고 광합성도 하는 종도 있고, 완전히 기생하는 종도 있는 그런 식물이다. 하지만 그 단어만 단순하게 생각해 봤을 때, '겨우' 먹고살더라도 그 삶을 이겨내면 우리의 삶은 그 차만큼 참 달 것이다.


겨우 빌어먹고 사는 인생이라도, 힘들어도, '사료'를 먹던 아니면 그 와중에 겨우 '식사'를 하던, 우리의 삶의 끝은 겨우살이 차의 그 맛만큼이나 달달하기를.


당신이 사료를 먹던, 식사를 하던,


나는 당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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