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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Mar 18. 2022

[픽션]극락식당

1-9

잔잔한 어둠이 내려앉은 식당의 바테이블, 그 가운데 솟아오른 빛 안에 홀로 앉은 연한 녹색의 '새마을' 모자를 쓴 그 남자, 상걸. 그는 불안했다, 초조하고 심장이 조금씩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사자를 따라서 도착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기분이었으나 자신과 정답게 막걸리에 전을 곁들여 대작을 하던 마스터는 잠시 머리 위에 느낌표가 떠오르듯, 바쁜 일이 갑작스레 생겼다며 부엌으로 들어가서는 감감무소식이다. 벽 위에 걸린 고전적인 양식의 괘종시계만이 분침과 초침을 옮겨가며 똑딱거리는 소리만이 그의 머릿속에 울렸다.


부스럭


문이 닫힌 후라 부엌에서 빛을 가리는 마스터의 인기척도 차마 느껴지지 않던 바테이블 너머의 구석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상걸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반가운 마음에 들어 올렸다.


"마스터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방긋 미소를 띄운 얼굴로 하얀 셰프 복장에 소매를 반쯤 걷어올린 마스터의 양손의 원반 위로 상걸의 눈에 익숙한 반찬들이 보였다. 축 늘어진 모양새이지만 울긋불긋한 고춧가루와 퍼렇고 하얀 줄기가 어우러진 파김치,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시절에 상걸이 가족들과 즐겨먹었던 백김치는 잘빠진 여인네의 허리처럼 백옥과 같은 잎사귀를 뽐내고 있었고, 투명하고 상큼한 향내가 올라오는 마늘종 장아찌. 우연스럽게도 상걸이 살아생전에 제일 좋아하던 반찬들이었다, 가족들과 둘러앉은 상에서 고기나 생선과도 같은 비싼 반찬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게 먹었던 밥상의 연출자들.


"엇, 마스터께서 제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어떻게 아시고...?"


"다 방법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후훗, 저승은 저승만이 일처리 방식이 있는 것이랍니다."


"하하... 그렇군요, 이곳을 떠나기 전에 더 기쁘게 갈 수 있겠어요."


상걸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어색한 웃음으로 앉으려는 찰나, 마스터는 그에게 반찬과 백반을 내어주며,


"그런데 여기 올 때부터 우리가 얘기하던 그 반찬이 빠지지 않았나요? 여름에 먹던 그 아삭아삭하던, 그거요."


"열무김치 말씀이시군요, 이제 그건 괜찮습니다. 아내가 하던 비법이 있는 음식이니 여기서 먹지 못해도 어쩔 수 없겠지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스터는 검지 손가락을 양옆으로 저으며 다시 웃었다.


"아까 말씀드렸죠? 저승에는 저승의 방법이 있다고."


상걸은 순간 자신이 아직 저승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그 의식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평생,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흑단발의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눈이 맑고 동그랗던 그 아가씨.


"당신이 한 번도 뵌 적 없는 우리 엄마한테 고마워하세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당신 딸을 혼자 죽도록 내버려 둔 잘한 것 하나 없는 사위라고 무슨 반찬을 이렇게 바리바리 싸주신담."


"여.... 여보..."


심장이 뛰고 혈관에 혈액이 흐르는 살아있는 목숨의 사람이 아니지만, 상걸은 온몸의 힘이 주르륵 흘러빠지는 기분으로 일어났던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반가움, 기쁨, 슬픔, 민망함 그리고 미안함이라는 감정들이 오고 가며 교차하는 상걸의 얼굴.


그러한 그의 마음을 잘 읽었는지 아직 서운함과 미운 마음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순은 자신이 들고 나온 열무김치와 소면을 집어던지지 않고 얌전히 상걸의 앞에 착륙시켰다.


"소면이 굳기 전에 얼른 들어요, 당신이랑 농막에서 새참으로 먹던 그 맛 그대로 가져왔어요. 옆에 있는 마스터님이 손을 조금 거들어준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어."


상걸의 눈, 코, 뺨은 이미 붉게 물들고 그의 표정이 담기고 명순의 얼굴이 비치는 커다란 눈물방울들이 맺혀 그의 안구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 여보.... 흐흑... 흑흑.... 미안해... 내가 미안해.... 미안하오, 정말... 내가 어리석었소, 나를 용서하시오... 흑흑...."


"울지 말고 얼른 들어요, 당신이 우니까 나도 슬프잖아요."


"응... 응... 그래, 알았어 명순이. 으흐흐흑..."


상걸과 명순의 영문 모를 '저승은 사랑을 싣고'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십 년의 말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가 터진 후유증은 길어질 듯 보였다.


"자... 저는 이만 부엌에 잔업이 남아서요... 후후... 두 분 못다 한 말씀 나누시죠.. 훌쩍... 에고, 감기가 왔나.."


영체이기에 감기에 올리 없는 마스터는 눈을 냅킨으로 찍어 누르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상걸은 아직 눈물이 (그리고 콧물이) 흐르고 있는 얼굴로 젓가락을 들고는 열무김치와 소면을 한 움큼 집어 입으로 쑤셔 넣듯이 삼켰다. 사각거리고 아작거리는, 양념과 수분이 가득한 열무김치가 상걸의 입안에서 씹히는 소리가 상걸과 명순만이 남은 고요한 식당 안에 울려 퍼졌고 명순은 천천히 바 테이블 밖으로 나와 상걸의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와 그녀의 의자 사이, 명순이 현재 상걸에게 느끼는 그 감정의 사이였다.


그리웠던 맛,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 없었던 맛, 보고 싶었던 맛, 끌어안고 울고 싶었던 맛, 상걸이 수십 년 동안 원했으나 얻을 수 없었던 맛을 그는 저승에서야 볼 수 있었다.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와 열무국수가 상걸과 만나는 소리만이 한참을 이어졌다. 상걸의 입가에 묻은 고춧가루가 사라지며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야 그는 인생의 끝과 죽음의 시작에서 만난 식사를 마쳤다.


"당신을 생각하기만 해도 꼴 보기가 싫어서 오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죽어서 저승에 올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당신이 죽도록 미웠거든요."


정적을 깨며 명순이 입을 열었다. 상걸은 말없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더 남아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어요. 여기 오는 길에서도 내가 당신이 했던 일들에 대해서 화를 내자 사자님이 한마디 하시더군요."


'정말로, 네가 죽었을 때, 네 남편이 오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인간의 말은 일단 들어보고 볼 일이지.'


"그래서 여기 왔어요, 적어도 당신의 그 못난 면상은 보면서 얘기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묻고 싶었어요."


상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물어봐, 명순이."


명순은 약간의 분노와 애증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죽던 날, 왜 내 곁을 지켜주지 않았죠? 왜 오지 않은 거예요?"


상걸은 명순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니야, 나는 당신에게 왔었어, 곁을 지키려고. 하지만 많이 늦었었지.... 미안해, 용서를 받고 싶어."


"왔었다고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가 눈을 감고 사자님을 따라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도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거짓말이 아니야, 명순이, 내 말을 믿어줘. 당신이 죽던 날, 나는 정말로 집에 왔었어."


상걸은 명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치의 흔들림이 없는, 생전에 남편과 아내이기로 약속하던 그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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