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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로 Mar 21. 2022

우동, 추운 저녁의

그 '죽여주는' 국물과 쫄깃함에 대하여

지나간 겨울은 작년의 겨울보다 유독 더 길게 느껴졌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눈이 더 많이 왔다고 생각해서 그럴까.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내리는 함박눈이 강릉을 하얗게 덮은 날부터 겨울이 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날은 집에 함께 사는 이쁜 여자와 우리의 아주 좁고 길쭉한 투룸 베란다에 간이의자와 나의 타악기인 카혼을 놓고서 나란히 앉아 바깥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우슬초 차를 후루룩 거리며 마셨다.


눈이 조용히 내리는 날,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결혼 전에도, 그 후에도 크리스마스와 곧 다가올 새해라는 두둥실한 분위기에 떠밀리지 않는 우리 둘이라 크리스마스라는 기간이 낭만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고요하게 함박눈이 내리는 밤,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받은 거울처럼 새하얀 보름달(이었나...?)이 어두운 밤하늘과 뿌연 구름들 사이로 은은한 파동을 내뿜는 그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초라한 베란다에서 달달한 차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낭만적이었다.


함께 삶을 살아갈 짝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크리스마스이브고 뭐고 그거는 그냥 12월 중 하루일 뿐이기에 나는 환상 속의 세계에서 모험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 그러한 것에 비하면 상대적인 기쁨을 누리고 있기에 가질 수 있는 낭만.


그렇게 차를 호록 마시고 있다 보니 이쁜 여자가 내 눈을 그윽이 바라보며 한마디를 꺼낸다.


"아...ㅅㅅ우동 먹고 싶다."


"국물이 (꿀꺽) 끝내주는 그거?"



속초 우동당의 온우동


누군가는 크리스마스이브 밤하늘과 함박눈이 겨우 만들어준 그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어이없는 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음식에 진심을 다하는 우리에게 겨울 눈 오는 푸근한 밤 가쓰오부시 (혹은 비슷한 맛을 내는 인공조미료)로 달큼하고 짭짤하고 감칠맛 넘치는 연갈색의 국물에 말아놓은 즉석 우동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진지한 사안이었다.


바깥은 눈이 적어도 2~30센티 정도로 쌓여있었으며 도로 위에 다니는 차는 오직 제설차와 체인 혹은 스노타이어를 장착한 차량뿐이었다. 도로에 워낙 차가 다닐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라 주변에 살고 있는 젊은 커플들이나 가족들이 나와서 광활한 도로 위에 벌렁 누워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 다다르기까지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나가는 귀찮음과 추위를 감수하고 ㅅㅅ우동을 사 와서 먹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할 정도로 그 우동은 정말 국물이 죽여준다.


간부로 군생활을 하면서 집에 퇴근하고 올 때에 편의점을 지나치면 괜히 생각이 나서 1,2개씩 집어 들고 와서 홀로 추웠던 나의 그날들의 저녁에 온기를 채워주던 그 컵우동. 그와 비슷한 컵우동에 관한 맛의 추억을 이쁜 여자도 갖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나와 입맛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쁜 여자는 이번 추운 겨울에 그 우동을 많이 찾았다.


25일의 0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에 우리는 빠르게 선택을 해야 했다, 야식으로 ㅅㅅ우동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국 어떻게 할지 말지 고민하는 와중에 나는 내가 앉아있던 카혼에서 팔짱을 풀고 벌떡 일어서서


"에이, 쌔벽 가자. ㅅㅅ우동 먹자. 까짓 거 먹으면 되지."


"가자!"


그렇게, 2021년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집 앞 편의점에서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ㅅㅅ우동을 구하기 위한 부부 원정대는 결성되었지만 아쉽게도 그날은 ㅅㅅ우동을 구할 수 없었다. 겨울밤의 효과인지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들이 모두 다 ㅅㅅ우동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우동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의 즉석 생우동을 사 먹었지만, 2500원짜리 그 서민의 고급 즉석 우동 맛을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이후에도 겨울밤이면 ㅅㅅ우동을 곧잘 먹으러 갔고 자주 편의점에 들어오는 제품이 아닌 것인지, 검고 하얀 무늬를 지닌 즉석 튀김우동을 대신 사 먹으며 감칠맛을 갈구하는 서로의 영혼을 저렴하게 위로하기도 했다.


12세기 중국의 면문화가 일본으로 수입되어 시작된 가락국수의 문화는 한국으로 들어와 오늘날의 우동이 되었는데, 빠르고 간단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면이기 때문에 특히 빠르고 저렴하고 배부르게 먹어야 하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인기 메뉴로 무조건 자리 잡게 되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 가족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각 부모님들의 고향으로 향해야 했던 한국인들은 누구나 휴게소 우동에 대한 묘한 친밀감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안 친하다고 말씀하시면 강요는 안 하겠습니다만...)


탱글 거리고 쫄깃한 면발, 짭짤하고 감칠맛 넘치는 육수, 따뜻한 온기에 바삭한 튀김과 매콤한 파, 고추 고명. 몇천 원을 조금 더 얹으면 비록 냉동일지라도 우동 국물에 적셔먹으면 촉촉하게 입으로 들어와 고소함과 바삭함(혹은 눅눅함)으로 혀를 즐겁게 하는 튀김까지. 아아, 우리는 이 저렴했었지만 이제는 곧 더 비싸질 이 음식을 1년에 두 시기에 간절히 그리워한다.


경기도에 살았던 나의 가족은 명절이면 부산에 계신 친가에 가기 위해서 항상 고속도로나 국도를 따라 여행을 했고 그 와중에 잠시 요기를 위해서 먹는 우동은 어린 시절 나에게 별미였기에 이렇게 우동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많은가 보다. 그 시절에 우동을 먹을 때에는 우동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아서 그냥 우동이나 어묵 혹은 유부가 더 얹어진 우동들 밖에 없었지만 세상이 더욱더 좋아지고(맛있어진) 오늘은 온갖 종류의 우동들을 휴게소에서 더 먹을 수 있다.


재미있게도 대한민국의 2대 명절이 모두 추운 날에 몰려있기 때문에 쌀쌀한 날이면 그 가락국수가 더 생각나는 게 아닐까?


겨울이 막 끝나고 봄으로 넘어오는 어느 날 밤에 이쁜 여자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이 여자가 갑자기 말하는 이 소리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홍천휴게소 튀김우동 먹고 싶다."


"ㅋㅋㅋ 그게 그렇게 맛있었어?"


"응! 국물도 맛있고 튀김도 맛있었어. 네가 추천해줬었잖아."


"뭐, 그게 먹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엄청 맛있기는 하니까."


얼마 전, 일산에 사는 커피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갔다가 집에 오던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홍천휴게소에 들렀었는데 그때 먹었던 튀김우동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작년 철원에 혼자 차를 몰고 친구를 방문하고 왔었던 나는 홍천휴게소에 들러 튀김우동으로 점심을 먹었었는데, 그게 맛있어서 그때에도 홍천휴게소의 튀김우동을 먹자고 했었던 것이었다. 빠르고 푸짐하고 바삭하게 나오는 그 튀김우동을 이쁜 여자는 정말 맛있어했다(나는 또 먹어도 맛있었다).


"그런데 홍천휴게소 가려면 차도 있어야 되고 일부러 고속도로도 타야 되는데?"


"그럼 우리 춘천(친정)에 가서 막국수 먹고 오는 길에 들려서 우동 먹자."


"와.... 천잰데?"


"그렇게 우리만의 '누들로드'를 찍는 거지."


"아주 바람직하고 건설적인 생각이군. 올해 안에 진행시켜."


올해에 가락국수 덕분에 즐거울 일이 하나 더 생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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