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성장을 믿기로 한 해
여기서 지낸 지도 어느덧 꽉 찬 아홉 달이 되었다.
숫자로 보면 짧지 않은 시간인데,
돌아보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연말을 보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과 유럽을 오가며 숨 가쁘게,
하지만 마음만은 유난히 충만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현실 같지 않게 느껴진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많았고,
그만큼 감사함도 커졌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평범한 하루가 이렇게 소중할 수 있다는 걸 이곳에서 처음 배웠다.
아마 크리스마스와 새해 당일은 집에서 조용히 음식을 해 먹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며 보낼 것 같다.
누군가에겐 조금 쓸쓸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 하루조차 감사로 가득 찬 시간이다.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마음 놓고 쉬어도 괜찮은 하루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타지에서의 생활이 알려주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의 목표는 분명했다.
영국 영어를 제대로 듣고, 느끼고, 익히는 것.
그리고 여행을 통해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는 것.
기회가 있다면 다양한 곳에서 일해 보고 싶었고,
영어 실력도 눈에 띄게 성장시키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보자는 다짐이 이곳으로 나를 데려왔다.
하지만 한 해를 차분히 돌아보면,
여행을 제외하고는 ‘무언가를 크게 이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어는 특히 그렇다.
점수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가 느끼는 감각과 주관적인 확신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잘하고 있는지, 나아지고 있는지 스스로도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 내가 예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변화.
인생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나는 분명히 우상향하고 있다는 감각이 있다.
느리지만, 멈춰 있지는 않다는 믿음 같은 것.
그래서 새해의 목표도 여전히 ‘영어’다.
영국에 머무를수록 영국 영어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진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케미가 너무 좋고,
그 관계들이 소중해서 더 잘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영어는 이제 단순히 공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말이 조금 서툴러도 웃음으로, 눈빛으로, 분위기로 이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수록 더 욕심이 난다.
더 잘 말하고 싶고,
더 깊이 이해하고 싶고,
그들의 농담과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영어는 점점 ‘필요’가 아니라 ‘진심’이 된다.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삶에서도
영어를 계속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지고 있다.
그런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점점 더 선명해진다.
아직 구체적인 그림은 없지만, 적어도 방향만큼은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도 많다.
한국에서도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퇴사를 했고,
영국에서도 처음 다닌 곳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
이직을 고민하면서도 결국 지금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나를 볼 때면,
답답함이 올라오기도 한다.
더 나은 조건, 더 새로운 환경, 더 빠른 성장을 기대하며 이곳에 왔는데
또다시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선택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이라는 것.
쉽게 떠나기보다는,
충분히 애써보고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정말 더 좋은 기회가 온다면,
그때는 또 용기를 내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멈춰 있는 기다림은 아니다.
현재를 최대한 느끼고,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간이다.
오늘의 감정과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연말을 해외에서 보내는 건 오래전부터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 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가는 나를 보며,
조금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2025년은 아마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해가 될 것이다.
나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고,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나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된 해.
보이지 않는 성장을 믿기로 한 해.
그게 바로, 나의 202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