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저는 '크몽'을 포함한 여러 플랫폼에서 퇴고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첫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는 KBS 작가로 활동했는데, 그때도 수없이 많은 대본을 생방송 30분 전까지 고치고 또 고쳤지요. 글은 우리가 눈으로 읽을 때보다 귀로 들을 때 어미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라디오 방송의 꽃은 해당 프로그램의 오프닝입니다. 저는 잔잔하게 깔린 음악의 리듬에 거슬리지 않는 글, 어느 청취자가 들어도 기분 좋게 스며들어야 하는 글, 제가 쓴 원고를 생방송 5분 전에 처음 집어 들었더라도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아나운서의 혀를 꼬이지 않게 하는 글을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글 쓰는 일이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저는 이렇게 '시를 쓰는 듯한’ 글쓰기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면서도 가장 폭넓은 대중에게 가닿을 수 있는 글쓰기의 정수라고 여겼습니다. 대중적인 글보다도 작가만의 개성 있는 문체, 작가세계가 암호의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글을 사랑했던 저는 TV 작가로 있을 때 '화면에 바르듯이' 글을 써야 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라디오 메인작가가 되면서부터는 방송 대본 쓰는 일을 점점 사랑하게 되었어요.
방송용 글은 다듬을수록 청취자분들에게 더욱 울림 있게 가닿았습니다. 방송 다음 날 아침 모두에게 공개되는 모니터 요원의 일지가 그랬고, '이지영 작가' 앞으로 온 편지들이 상장처럼 느껴졌지요. 회식 자리에서 김지원 아나운서가 "언니, 요즘 언니가 주는 원고가 정말 내 입에 착착 붙어요! 하나도 고칠 게 없어요!"라고 말해주었을 땐 어깨가 이만큼 올라간 기분이 들었어요.
크몽에서 퇴고 전문가로 일하다 보니 그 밖의 다른 플랫폼에서도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많은 분이 자신이 쓴 글을 꺼내어주십니다. 제가 작업하는 글의 종류는 자기 경영에 관한 전자책이나 언론매체 기고 목적의 칼럼, 에세이가 많습니다. 원작자가 쓴 글을 다듬다 보면 저도 에세이를 쓰곤 했던 과거의 일들이 떠오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창작 욕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요.
그래서 저도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표현하기 위해서, 창작 욕구를 참을 수가 없어서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문득 기억해 냈던 거예요! 처음에는 블로그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에세이, 소설, 시도 썼습니다. 그림책에 들어갈 글도 썼습니다. 내년에는 꼭 그림책을 만들고 싶거든요.
전자책도 쓰고 있습니다. 책의 주제는 '퇴고 매뉴얼'이지요. 책을 쓰면서 어느 날 새벽에는 커뮤니티 '꿈블'에서 퇴고에 대한 온라인 강의를 했습니다. 셋째 아이를 출산하느라 오랜만에 하는 강의여서 수줍음이 닭살 돋듯 일어났지만, 곧 사투리를 신나게 발사하며 웃고 있더라고요, 제가.
강의가 끝나자 저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계셨던 '꼼딸'작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초안을 쓰고 나면 손대기가 싫어질 정도로 귀찮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퇴고하시나요? 퇴고의 즐거움이라는 게 있을까요?”
아…! 퇴고의 즐거움? 나에게 그런 게 있었던가? 그 자리에서 딱 꼬집어서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퇴고가 특별히 귀찮거나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싫지 않았을까? 사실은 좀 재미있고 뿌듯하기도 합니다. 순간, 저에게 퇴고의 즐거움이란 ‘찾는’것이 아니라 ‘찾아오는’것이었다는 걸 깨달았지요. ‘퇴고의 즐거움’이 저에게 특별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자 저는 꼼딸작가님이 보는 앞에서 '퇴고의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메모해 버렸습니다.
그동안 ‘퇴고의 즐거움’은 어디서부터 샘솟아왔던 걸까요? 저는 그 원천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나도 몰랐던 이야기가 내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고, 제가 찾아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이야기’라는 생각에 호기심 가득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오래된 강박을 따라 직업적 승화 지점을 찾은 것일 테니 작가 일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짐작이 틀렸기 때문이지요.
퇴고가 주는 즐거움. 그 원천을 찾기 위해 저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볼수록 직업병’이라고 하기엔 오히려 직업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취미와 관련짓기도 어려웠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오래된 습관들이 드러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그 습관들은 정말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이어서, 그것에 관해 불안이나 압박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강박도, 병도 아닐 거예요. 퇴고하다 보면 오히려 힐링이 되거나 짜릿한 쾌감(!)이 있었지요.
제가 걷는 퇴고의 여정에서 여러분이 공감할 만한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부터 저는 그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