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꼭 억울한 것부터 생각이 납니다. 이런 제가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중 하나를 꺼내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조금 힘들게’ 며느리 역할을 하셨습니다. 큰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삼촌은 비혼이셨지요. 저와 동생, 그리고 동갑인 사촌도 모두 잔심부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평소 ‘이 집’에 있는 남자 어른들은 아무도 어머니를 돕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정신없이 설거지하다가도 거실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는 그 어른들을 돌아보며 기분 좋은 말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화를 내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버리기도 하셨습니다. 엉엉 울며 달려가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저의 손을 뿌리치면서요.
그날은 명절이었고, 각지에서 온 먼 친척들을 대접하기 위한 손님상 준비는 남아있는 유일한 ‘여자’인 저와 동생의 몫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버린 어머니에 대한 비난의 말들이 우리 자매를 향해 쏟아져도 뭐라고 대들어야 할지를 몰라 가만히 듣고 있어야 했어요. 저와 동생을 버린 것 같은 너무나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친척 어른들이 더욱 얄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른들 앞에 불려 나가 엄마 욕을 대신 듣다 보니 그 끝에는 이런 말씀도 들려왔습니다.
“그럼, 너희 엄마가 가버렸으니 너희 둘이서 상 차려라, 과일도 깎아오고!”
나머지 어른들은 우리를 힐끔거릴 뿐, 아무도 우리 자매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지요.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명절마다 거실에서 종종거리는 여자애가 귀엽다는 듯 쳐다보던 눈빛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람이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을 저는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옆에 엄마도 없으니 우리에게 그런 폭언을 퍼부어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아이들이니까 듣고도 금방 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약자에게 억지를 부리는 알량한 권력, 침묵으로 동조하는 잔인함. 집안 어른들이 한순간에 우리에게서 돌아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받아들여라, 이런 불공평한 삶은 운명이다, 옛날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라고 압박을 해오는 것 같아 숨이 막혔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어른이 말하니까, 대꾸하지 말라고.
“저희는 할 줄 모르는데요?”
이건 받아쳐야겠다 싶어 겨우 꺼낸 한마디에는 ‘즐겁게 명절을 보내고 싶은 어른들이 직접 하시면 될걸, 굳이 어린아이를 시켜야겠어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화가 나서 그의 어린 자녀에게 분풀이하는 것이, 당신들이 생각해 낸 합당한 방식인가 보죠?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엄마가 가버렸잖아요!’와 같은 느낌의… 토해내기가 겁이 나서 울컥 나오기도 전에 꿀꺽 삼켜버린 말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다행인지도 몰랐습니다. 확 그냥 한 대! 때릴까 봐 심장이 마구 쿵쾅대고 있었거든요.
‘사람이 이렇게 쉽게 변할 수도 있구나. 이전까지 우리를 대하던 시선과 말투는 단지 분위기상 꺼내 쓰던 일회용 감정에 지나지 않았구나. 어린아이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도 있구나. 어쩐지… 그래서 우리에게는 세뱃돈은커녕, 그 흔한 새해 덕담도 오지 않았구나.’
‘나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엄마를 욕하는 저 사람들 앞에서 주방 도구가 되었다. 엄마는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구나. 엄마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엄마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변하게 할 방법은 없는 걸까.’
말이 되어 전할 사람도 없이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엄마는 그날 저녁이 되기 전에 할머니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셨지만 반가움도 잠시, 어쩐지 말을 걸기가 어려웠어요. 사실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보다 택시에서 손을 뿌리쳤을 때의 충격이 더 컸어요. 손을 뿌리치고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봤던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거든요. 사람의 감정이란 상대의 존재를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시간이 흐르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그날 겪었던 일과 그때의 감정들, 속으로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은 어느새 뾰족한 가시가 되어 나만의 언어로 계속해서 만들어졌고, 다듬다가, 조용히 바스러졌다가, 다시 만들고 다듬다가 때려 부수고를 반복하며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소심한 여자아이의 언어가 이 집을 뒤흔들 아주 견고한 망치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까지, 저는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여자만 명절날 음식 준비를 하는 것에 대해 틀렸다고 말할 때 근거처럼 제시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정말 많았습니다. 이런 이슈들은 매년 명절마다 신문의 지면과 뉴스에 등장하고, TV 프로그램에서는 빼먹지 않고 한 번씩 언급해줘야 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캠페인처럼 외치는 ‘남녀평등’, ‘가사 분담’과 같은 것들은 제가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바꾸는 데에는 한두 마디의 언어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그 단어들을 입 밖에 낼 때는, 어른들의 눈에 사춘기 소녀의 단순한 반항처럼 비치지 않아야 했고, 제가 그 말을 할 때는 누가 봐도 ‘이 집안’에서 논리로는 따라갈 수 없는 제법 기대되는 ‘차세대 인재'의 모습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에게서는, 조금 껄끄럽더라도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봄 직하다고 느낄만한 저만의 '이미지'와 '밑밥 언어'가 필요했죠.
그것을 위해, 저는 무엇을 했을까요? 네, 학교에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수업 시간은 좋아했지만, 시험을 잘 쳐볼 의지도 자신도 없어서요. 저의 ‘활동’은 부모님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들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에 대한 이야기가 친척들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이슈가 되게끔 했던 거죠. 전교 1등 같은 것을 노릴 자신은 없어서, 글쓰기로든 다른 무엇으로든 상을 받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은 꼭 도전해서 따냈던 기억이 납니다. 합창부 활동은 상을 탔대도 싫어하셨지만요.
직업이 ‘방송작가’라고 하면 보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또 쉽게 기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방송작가가 된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KBS'라는 간판은 꽤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쟤, KBS 방송작가란다.”
저는 집안 어른들이 저에게 호기심을 가지며 방송가 소식이나 제가 하는 일에 대해 말을 걸어오는 것이 좋았습니다.
가십거리에 관심이 없었던 저는 말을 아꼈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는 체를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아는 체를 할 때는 머릿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고 다듬었어요. 그런 적은 없었지만, 만약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면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수치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어떤 때에는 누가 듣든 말든 혼자 잔소리하듯 지껄이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삼촌께서 그런 저와의 논쟁을 가끔 받아주셨습니다. 나중에는 삼촌의 맨 케이브(man cave)에 꽉 들어찬 LP판들과 진공관 앰프를 보고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지요.
그리고 여느 때처럼 제사를 지내던 중에, 남자 어른들이 절을 하는 모습을 주방 한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며 모른 척 큰소리로 능청을 떨었습니다.
“왜 여자는 절 안 해? 우리도 해야지!”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는 풍경은 다 다르지만, 이 집에서 여자도 절을 했던 것은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삼촌께서 먼저 일어나서 음식 준비를 도우셨습니다. 그랬더니 큰아버지께서 집 마당에 따로 만든 가마솥에 왔다 갔다 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쌓인 설움은 완전히 가시지 않으셨을지 몰라도, 확연히 달라진 이 집의 명절 풍경은 저에게는 저의 언어로 이기기 위해 안팎으로 고군분투해 얻어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겁 많고 소심한데 반항적이고 뒤끝도 있고 영향력도 지니고 싶은, 이런 저의 모습을 깨닫게 했던 사건들이 ‘퇴고 DNA’가 활성화되도록 만들었을까요? 어쨌거나 저는 이런 유년 시절을 지내오면서, 마음속에 품은 언어를 더욱 존재감 있게 다듬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 하건, 글로 쓰건, 처음 어떤 일이 시작된 지점(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내가 기분 나빠지기 시작한 대목)에 대해 골몰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뒤끝(!)까지 찍고야 마는, 수미상관의 미학도 즐기게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