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의 즐거움’으로 안내하기 위한 이 책을 집필하면서, 저는 책을 읽기도 하고 퇴고하기도 했습니다. 크몽에서 얼굴도 모르는 퇴고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지인의 원고를 처음으로 받아 보았는데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런저런 표시를 하게 되니 첨삭하는 것 같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역시, 자신의 원고를 퇴고 의뢰했던 지인도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더라고요. 최대한 정중하게, 혹여나 기분이 나쁠까 봐 조심스럽게 작업을 했음에도 그랬습니다. 그의 직업도 언어로 먹고사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이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생방송에서 토씨 하나 고쳐 읽은 탓에, 제 얼굴을 잘 익은 홍시 마냥 달아오르게 만든 아나운서의 빨간펜처럼 말이지요.(윽!)
하지만 그의 원고는 그동안 받아온 다른 퇴고 의뢰에 비해 작업하기가 쉬운 편이었습니다.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했기 때문이었지요. 마음이 더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해줄,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렸습니다.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일인가…’ 하고 체념하고 있던 차에, 룰루 밀러의 책 를 읽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우생학’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충격을 받았어요.
우생학이란 인간이라는 ‘종’을 생물학적으로 가지치기해서 진화론적으로 더욱 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적격'인 종자만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도록, 결국에는 유전학적으로 열등한 종자는 '부적합' 딱지를 붙여 '교배가 불가능(불임화)'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학문이었습니다. 주인공이 과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회고록을 시작으로 추적해 나가는 그의 행적과 미국 전역에서 시행된 '우생학 캠페인'은 비인간적이고 비과학적이기까지 합니다.
제가 갑자기 우생학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우리가 모두 ‘글’을, 이 외에 모든 콘텐츠와 크리에이터, 그리고 그의 뮤즈들까지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우려가 일었기 때문입니다. 퇴고가 즐겁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글이든 남의 글이든, 읽고 있는 글이 '부적격'이라 판단하고 억지로 읽고 있다는 생각 때문은 아닌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입니다.
같은 질문의 답을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앞서 무의식 중에(!) 밝힌 저의 입장을 보면 분명히 일하기 쉬운 글이 있고, 일하기 어려운 글이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흠칫! 놀라며 잠시 룰루 밀러의 책에서 언급되는 ‘생명의 사다리’를 떠올려 봤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생명의 사다리란, 우월한 생명에게 높은 위치를, 열등한 생명에게는 낮은 위치를 배정합니다.
'우월'하다는 것은 시력이나, 청력 등 기본적으로 몸에 있는 기능이나 두뇌의 발달이 우월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보다 멀리, 더 넓게 볼 수 있는 생물도 있고, 더 오래 사는 생물도 있고, 인간보다 패턴을 더 빨리 숙지하며, 지도도 없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는 생물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 생명의 사다리에서 가장 꼭대기에 위치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분류학자들은, 생명의 사다리에 생물들을 배정하는 작업을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한 신의 메시지를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사명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생명의 사다리가 제시하는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하며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일단은, 이것을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인 '직관적 질서'라고 해두자고요.
그러면 이제는 '글'이라는 것을 '퇴고의 사다리'에 배정해 보도록 할까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왜, 언제부터 그래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 수긍하며 살아온 듯한 '직관적 질서'를 꺼내어 보는 겁니다. 우리의 '직관적 질서'에 의하면, 모든 말과 글에는 상대방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신문 기사나 표어('자나 깨나 불조심' 같은)의 글들은 어떤 글보다도 가장 빠르게 뜻을 전달할 것이고, 광고 카피는 가장 임팩트 있는 글, 사건·사고 기사 혹은 폭력적이고 성적인 묘사가 있는 소설은 가장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자극적인 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나름의 역사를 담고 있는 편지나 일기, 수기(제2, 제3의 ‘안네의 일기’가 될지도 모르는)들은 너무도 사소해서 읽을 가치가 없는 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를 위해 사교육을 해가면서까지 배우는, 우리의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시와 소설은 암호문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제가 퇴고 작업하고 있는 작품들이 더욱 전달력이 있으려면 2장부터 시작하는 본격적인 이야기들을 1장으로 끌어와야 할 수도 있고, 더욱 임팩트가 있으려면 주인공이 충격적인 사건에 직면한 순간들을 더욱 막장인 표현들로 몰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이 체념하거나 방관하는 장면에서는 좀 더 무기력하고 음울한 표현을 권하게 될 것입니다.
강연, 토크쇼 등으로 제법 알려진 저자의 어투를 크게 변형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어떨까요? 저자의 고유성을 ‘훼손’하는 건, 독자와 저자 중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집필과 퇴고에 있어 그 결과의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혹은 그를 아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작품에 크게 매료되거나 그것을 인생 책으로 삼기도 하는 것은 그 작품이 최고의 스토리를 가졌거나, 혹은 세계 최고의 문학상 수상작이어서가 아닙니다. 책 속에 스며든 메시지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인식하도록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책 속의 이야기가 나의 지적 호기심을 일깨우고, ‘그럴 수’를 찾아, 나와 다른 삶의 방식에 공감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의 삶을 위로하고 응원하며, 잠들어 있던 것을 깨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나아가야 더 살만해지는지 알 수 있는, 그 부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