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공감이 좋다는 건 알지만 생각보다 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감수성이 아주 풍부하거나, 상담에 관한 공부를 했거나,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가져야 제대로 공감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면 근사한 말을 하면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고, 그러면 말도 잘해야 할 것 같죠. 또 어려움에 부닥친 누군가가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내가 그만한 경험을 했어야 진정으로 공감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이런 편견들도 수없이 존재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을 온 고등학교 동창 중 하나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너 정도면 나은 편이야. 우리 아빠는 너보다 훨씬 더 일찍 돌아가셨어. 고등학교 때.”
“그런 일이…. 난 그것도 모르고…. 아니, 나는 그때 왜 그걸 몰랐지?”
“내가 아무한테도 말 안 했거든.”
“힘들었겠네….”
“응. 그러니까 너도 힘내라. 간다.”
“… 와줘서 고마워.”
친구의 뒷모습은 학창 시절의 그때처럼 도도했습니다.
물론 친구가 어릴 적에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은 편’인 죽음이, 어떤 유가족에게 있을까요. 그때 장례식에 오신 집안의 어른 중 어떤 분은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시고 ‘그 정도면 호상(好喪)이다.’라는 말로 다른 이들의 통곡을 갈무리하려 했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유가족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면 그런 말이 어떻게 느껴질지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호상(好喪)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결례입니다. 죽은 당사자만이 유언처럼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나 다름없지요.
저는 소심해서 뭐라고 한마디 던지지도 못했답니다. 다만, 속상하면서도 마음에 돌덩어리 하나 얹은 듯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이 주문을 외워보았지요. ‘에휴…. 그럴 수도 있지….’
고등학교 시절, 한때는 거의 단짝처럼 붙어 다니기도 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저는 친구가 아버지를 떠나보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겠지만, 가끔 친구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 기복을 보였던 것과 연관 지어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가장 힘드셨을 친구의 어머니를 떠올려보기도 했지요. 뭘 해도 야무졌던 친구가,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친구의 말은 문상객이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고백에 가까웠죠. 그래서 그것대로 열심히 해석하고, 그 슬픔을 짚어보려 애썼습니다. 친구가 아버지 없는 시절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오고 있었을지를 말이지요.
공감과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를 위로할 때는 고통과 슬픔의 무게를 함부로 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저도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고요.
차라리 이 주문을 공식처럼 활용하면 생각보다 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에서 친구가 슬퍼한다. 혹은 덤덤하다. 아니면 기타 등등을 상황에 따라 대입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엄청 슬퍼할 수도 있지!’, ‘생각보다 덤덤할 수도 있지!’, ‘기타 등등일 수도 있지!’….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뇌 속에서는 적극적인 공감과 위로를 위한 태도를 만드는 장치가 가동되는 거지요.
우리가 던지려는 ‘공감’이라는 작은 물수제비. 물수제비는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공감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가지 법칙만 알면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혜신 님의 저서 ‘당신이 옳다’에 따르면 충고, 조언, 비난, 판단. 이 네 가지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그러니까, ‘너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다.’라는 말은 상대방의 고통을 비교하고 ‘판단’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위로받기는커녕 속이 더 쓰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화살처럼 가볍고도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크게 동요되지는 않았어요. 친구의 태도에 살짝 화가 났지만, 이걸 멍해졌다고 해야 할지, 소심했다고 해야 할지. 다른 문상객들과 인사 나누고 또 음식을 대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해야 할지. 그저 옛 시절 친구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해야 할지. 친구의 무례한 말, 저의 속상한 마음 같은 것보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지. 암투병 하시던 아버지를 그렇게 헌신적으로 간호하셨으면서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며 깊이 자책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마찬가지로 불효를 한 것 같아 너무나 마음이 아팠으니까요.
그런데도 친구의 말은 불쑥불쑥 떠올라 속을 후벼 팠습니다. ‘아니, 걔는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신기한 일이죠? 전에 들었던 기분 좋은 말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면서, 속상하고 억울한 것만 이렇게 기습적으로 뇌리를 스칩니다.
순간 적극적인 공감을 위해 던진 ‘그럴 수도 있지!’가 수면에 부딪힙니다. 물수제비가 성공하려면 부딪히며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튀어 올라야 하죠. 이때 ‘유의미 추정의 원칙’을 떠올려 보는 겁니다. 이 법칙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변형해 만든 말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간단히 말해 현행범이라 할지라도 범죄인으로 선고받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는, 수사에서 재판까지를 아우르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혹은 나의 말과 행동이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이 주문을 외우면 꽤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 악의가 있었을 리가.’,‘좋은 의미로 한 말이었겠지.’,‘장례식에 오니 저도 심경이 복잡해졌나 보다.’,‘그래. 그러니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간 거야.’,‘고등학교 때도 성격이 그랬으니까.’
어때요, 속으로 비난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의미하고 긍정적이죠? 악의가 아닌, 나름의 좋은 뜻이 내포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의미를 밝히는 겁니다. 내가 만만하고 싫어서가 아니라, 친구에게도 상처가 있어,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거라고.
이것은 생각보다 의외의 구석에서 작동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지적 호기심. 지적 호기심이란,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남의 이야기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본능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정보나 미지의 영역을 접할 때, 뇌는 자연스럽게 그 빈틈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실수, 말과 행동은 우리의 뇌가 받아들일 때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정보이자, 미지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그럴 수도 있지!’라는 공감을 넘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가정하면 우리의 뇌는 자동으로 생각을 뻗어나가 '그럴 수'라는 답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실질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럴 수'를 찾아가는 여정은 그 자체로 공감을 향한 커다란 물음입니다. 그러나 지적호기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혹시, 살면서 교과서의 열린 질문, 영화의 열린 결말을 접할 때마다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으셨나요? 말대꾸를 한다며 좀처럼 아이에게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부모와 사회 속에서 자라면서 우리는 질문 불능을 꽤 오래전부터 학습해 온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의 ‘그럴 수’는 이렇게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친구의 말과 행동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제 마음도 평온해졌습니다. 꽁해있다가 이제 와서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공감의 물수제비도 만들어졌네요. 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