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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Aug 25. 2021

나는 남의 아이를 가르친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일정 지식을 습득한 자로 학예가 뛰어나 삶의 모범이 되는, 선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가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선생님이란 그렇게 가진 자이며 많이 아는 자다.     


‘돌봄 교사’라는 명찰을 달고 들어선 첫 수업의 풍경이 떠오른다. 설레면서 두려웠다. 동네에서 만난 꼬마들을 제자로 만날 상상을 하니, 내 심장은 차분하게 뛰는 방법을 잃고 말았다. 학부모로서 이미 알고 있던 선생님들, 그리고 내 모교이자 내 딸들의 학교, 익숙함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왼발과 오른발, 순서에 맞게 겨우 발을 떼면서 돌봄 교실로 향했던 그날이 떠오른다.    

  

돌이켜 보면 그냥 주부이면서, 그냥 엄마였던 내가 ‘돌봄 교사’로 ‘학습지’ 선생으로 사회에 나오기까지 나는 덜 가진 자, 덜 아는 자였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 가진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기까지 조금은 특별한 도약이 필요했다. 긴 복도 끝에 있는 교실까지 왼발 오른발 순서에 맞게 걸어가야 할 정도로 나는 조금은 특별하게 성장했다.  

    

절 옆에 조금 멀리 외딴집이 우리 집이었다. 나는 겁이 많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정하지 않았다.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설령 어둠을 뚫고 집에 갈 일이 생겨도 엄마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생일에 미역국 먹는 게 흔한 일이란 걸 흑백 티브이로 알았으리라.   

   

그렇게 말이 없던 엄마는 심지어 첫 생리를 하는 딸에게 최소한의 준비물을 사주지 않았고 알려주지 않았다. ‘미라젤 주세요.’ 이 말은 아직 낯설었다. 엄마가 원망스럽다. ‘내 팔자 내가 알아서 하라는 거야, 뭐야?’ 심통도 났다. 적어도 같이 손잡고 농협에 가서 생리대 사는 모습을 엄마는 내 앞에서 시연해야 했다. 다 큰 열여섯 살에 초경을 하면 부끄럼도 없단 말인가? 해가 쉬이 지는 시골 사춘기 소녀는 표정이 없는 엄마와 그렇게 데면데면 살았다.     


아빠와 할머니를 지켜보자. 즉 모자지간이 아닌가. 난 어렸을 때부터 봐왔다. 외발 자전거에서 곡예를 하는 광경보다 더 불안한 모습이었다. 왜 그 둘은 싸워야만 하는가.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일화가 하나 꺼내보자. 겨울이었고, 엄마는 가오리가 먹고 싶었다. 겨우 스무 살 임산부에게 식욕을 누르는 건 어렵다. 하지만 아빠는 할머니 몰래 가오리를 사러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밟고서 가오리를 사 왔다.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빠는 내 코가 오똑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고, 한편으론 할머니를 원망하는 뜻도 내비친 것이다. 질투심 많은 할머니가 나이 들고, 한이 많던 아빠가 나이가 들어서 둘은 끝까지 화합하지 못했다. 그 속에서 난 중재를 배웠다. 다른 눈치는 없어도 싸움에 대한 촉은 예민했다.     


난 말 없는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엄마를 잃고 외로워하는 아빠를 시기별로 위로하는 ‘돌봄’ 가장이 되었다. 지켜보고 중재하고 위로하고 혼자 사색했던 소녀가 결혼을 하니 민낯이 보였다. 엄마가 알려주지 않았던 ‘나’라는 존재는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남편이 해주는 칭찬은 어른이 되어서 얻은 자신감이 되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게 점점 드러났다. 사회인이 되어도 기죽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익숙함이 넘치는 학교였지만 ‘돌봄 교사’로 들어선 학교는 낯설었다. 어색하지만 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것이다. 내 옷매무새를 훑어본다. 거울을 다시 들여다본다. ‘안녕하세요. 저는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할 돌봄 선생님이에요.’ 입을 뻥긋거려본다. 실전 연습은 이제 심장을 소리를 내게 했다.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아도 자꾸만 소리를 냈다. 열여섯 살의 어느 날, 생리대를 사던 그날의 용기를 기억해내며 난 진정하려 했다. ‘그래, 아홉 살 정도는 내가 긴장한 것을 모를 거야. 그리고 첫날인데 어리바리하면 어때.’ 처음은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야 했다. 처음 미라젤을 살 때처럼. 미라젤을 받자마자 검정 봉지에 둘둘 말아서 집으로 뛰어온 것처럼 혼자만 어색한 것일 거야.    

       

첫날, 정규 수업을 마치고 돌봄실로 달려오는 아이들 소리가, 아니 함성이었다. 적군의 소리인지, 아군의 소리인지 모를 함성이었다. 아이들은 오자마자 일초 정도, 내 얼굴을 바라봤다. 동네 아줌마가 여기는 웬일? 그때다. 아줌마로 불리기 전에 냉큼 내 소개를 해야 했다.


“애들아, 안녕. 나 알지? 오늘부터 너희와 함께할 돌봄 선생님이야. 우리 잘 지내보자.”


연습했던 ‘~요’ 말투는 반말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내게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바로 실전에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고마운 건가? 남자아이들이 많은 학년이었다. 첫날은 아수라 백작이 이들을 부추기는 게 아닌지 어지러웠다. 파이터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서로 바라만 보다가도 싸우는 아이들을 보니 다른 생각이 들 겨를이 없었다. 그냥 싸움 말리는 데만 첫날을 보냈다. 사랑에도 연결 작대기가 있듯, 싸움에도 지정된 상대가 있었다. 두세 쌍의 그들을 주목하면 된다. 난 중재하는 것에 익숙했다.      


남의 아이를 가르쳐 본 경험이 있는가. 내 아이보다 쉬울 수 없다. 쉽게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지켜보고 중재하고 위로하고 있다. 아직도 어렵다. ‘돌봄’ 가장이 ‘돌봄’ 교사로 서기까지 난 오늘도 남의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고 싶은 소망이 넘쳐난다. 덜 가지고 덜 아는 책을 읽고 지혜를 쌓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 남의 아이를 가르치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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