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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Aug 25. 2021

나는 아직 배고프다

영화 같은 꿈을 꿨다


‘다시 봐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 끝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목적지다. 계단 간격은 너무 멀어서 자칫 발을 잘못 떼다가는 강에 빠질 것만 같았다. 겨우 여덟 살 먹은 아이도 순식간에 내려갔고 남편도 내려갔다. 나만 남았다.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올라갈 수도 없다.

‘이 다리를 만든 공무원들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할머니들은 어쩌라고, 이따위로 만든 거지? 저 동네에 도착하면 바로 따질 거야.’

한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 순간 남편이 다시 돌아왔다. 난 오자마자 요란법석을 떤다. 그가 내게 돌아온 이유를 알기 때문에 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계단을 바라보기도 두려웠다.

“나 그냥 내버려 둬. 난 도저히 발을 디딜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자 남편은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다시 한번 계단을 봐봐.”

남편의 한 마디에 마법이 일어난 걸까?

“어, 아까는 분명히 계단 간격이 컸는데 언제 바뀌었지?”


 

가끔 꾸는 악몽 중 하나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게, 강 위에 있는 아슬아슬한 다리 계단을 딛는 것은 끔찍한 꿈이다. 등장인물만 바뀔 뿐 공중에서 헤매는 내가 안타깝다. 꿈속 귀신도 무섭지만 아무도 ‘119 구급대’를 불러주지 않는 그 꿈에서 난 늘 혼자였다. 하지만 어제 꿈은 달랐다. 남편은 마치 원효대사가 된 것처럼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역할로 등장했다. 여덟 살도 너끈하게 내려가는 계단이 나에게만 멀찍이 느껴졌던 건, 결국 내 마음속에 불필요한 볼록렌즈가 있던 것이다. ‘다시 봐봐.’ 이 말이야말로 스스로 나를 일깨워주는 말이 아닌가.


 

부부는 서로 보완해줄 수 있는 관계가 좋다고 한다. 나의 엄마와 아빠, 말 없는 엄마와 욱하지만 자식에게 헌신하는 아빠. 마음이 확장되는 ‘볼록렌즈’를 쓰고서 곰곰이 생각한다. 엄마는 오목렌즈, 아빠는 볼록렌즈가 아닐까. 빛을 모을 수 없는 오목렌즈이며, 빛이 너무 집중되어서 살을 태워 버리는 볼록렌즈. 두 렌즈는 세상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는 눈을 가지고서 나이에 맞게 사는 것은 어려운 숙제다. 그래서 숙제는 언제나 완성되지 못했다.


 

‘다시 봐봐.’


 

남편은 자꾸만 일깨워준다. 또는 소화하기 쉽도록 질긴 ‘인생의 섬유질’은 한번 씹어줬다. 내 것이 되도록 내 에너지가 되도록, 내 생각이 되도록. 그렇게 나의 인생이 완성이 될 줄 알았다.


 

영화 같은 꿈을 꾸고 영화 같은 보디가드와 함께 사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늘 굶주린 듯 길을 찾아 생각에 잠기고 뭔지 모를 갈급함에 무언가 배우기를 시도했다. ‘돌봄’ 가장이 ‘돌봄’ 교사가 되고 ‘학습지 교사’까지 정오부터 밤까지 열심히 사는데도 늘 배가 고팠다. 직업이 경찰관인 남편은 여전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토끼 같은 자식들이 끝없이 웃음을 만들어 주는데도 나는 늘 배가 고팠다.


 

뜨거운 엿물에 화상을 입은 엄마를 목격한 그날, 새벽 기도를 마치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던 그날, 엄마를 잃고 말이 없어진 아빠를 돌보는 그날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울컥 떠올라 열심히 살아도 나는 배부르지 않았다.


 

취미 생활로 시작한 피아노,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운동과 산책, 하루 24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알차게 살아도 나는 배부르지 않았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그 글이 쌓여가는 동안 나는 깨달았다. 마음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 나는 배가 부르다는 것을. 나는 글을 써야 했다. 일기가 글이 되고 글이 누군가에게 감동이 되고 울림이 된다는 댓글을 받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의 블로그에는 ‘돌봄’ 아이들의 함성이, 산책하면서 만나는 자연의 소리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제야 나는 배가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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