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샷만 넣어 주세요
때마침 비가 온다는 것은 동네 카페로 나가 글을 쓰기에 적격이라는 것인데, 아직 나에게는 노트북 챙기는 것도 어설픈지 충전기만 털레털레 들고 나섰다.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노트북을 챙겨 드는데, 비 오는 날 노트북 챙기는 모습이 큰딸에겐 미덥지 않나 보다.
“엄마, 노트북 떨어뜨리면 안 돼! 조심해.”
스물네 살 연상을 챙기는 큰 딸에게 대답 대신 웃음을 남기고 바삐 현관문을 나섰다.
자주 오는 동네 카페지만, 오늘은 메뉴판을 더 들여다보았다. 내 머릿속을 맑게 해 줄 그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통 흡수한 뒤 서너 시간이면 각성효과가 사라진다고 하는데, 나는 그것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글을 쓰기 위해 내 잠을 ‘제물’로 바칠 수도 있지만, 불면의 밤은 하루로 끝나지 않고 다음날까지 피로를 이월하기에 조절이 필요하다.
“카푸치노에 커피는 반샷만 넣고 주세요.”
적당한 타협점을 며칠 전에 찾았다. 커피를 끊은 지 몇 달이 되었지만, 커피만큼 글쓰기에 집중할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커피가 반샷만 들어간 카푸치노를 마주하고 우연히 본 기사는 이미 커피 서너 잔을 마신 사람처럼 가슴을 뛰게 했다.
“김영철, DJ에 이어 작가까지.. 부캐 늘리는 중 ‘가을 되면 북촌 와서 헤매기’ ”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그의 표정은 설레어 보였다.
그 기사를 읽고, 그 연예인의 표정을 주시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한참을 들여다봤다. 내 이상형이라서? 아니다. 글을 쓰는 그의 표정은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 즐거움이 내게 전염되었다. 나도 갖고 싶은 부캐가 글 쓰는 사람이니까.
내 블로그에는 천여 개의 글이 있다. 그중 내가 아끼는 카테고리는 ‘혼자 걷기’와 ‘아이들을 기억하다’이다. ‘혼자 걷기’ 글은 아침 산책 후 떠오르는 것들을 썼다. 어떤 날은 어제의 일을 정리하기도 했고, 또 다른 날은 오롯이 자연에 감탄하는 글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기억하다’, 말 그대로 기억하고 싶었다. 말썽 부리는 게 다반사인 아이들도 가끔은 천진함으로 나를 웃게 만든다. 글로 남겨둘 때, 아이들은 말썽꾸러기로만 기억되지 않기에 나의 글 서고(書庫)에 넣었다. 댓글 창을 닫았지만, 내 글에 공감하고 싶은 이웃들은 안부글에 응원글을 남겨주셨다. ‘커피 반샷’ 같았다.
지금은 나의 ‘글 서고’가 하나 더 늘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카페다. 즉흥적이고 앞으로만 전진하는 ‘커서’가 있는 블로그와 숙려 하며 제자리에서 깜빡일 때가 많은 ‘커서’의 카페에서 나는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어제 나는 커피 반샷 같은 댓글을 또 받았다.
아직도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게 어색하지만, 내 가방에는 책이 있고 필사 노트가 있다. 노트북, 책, 필사 노트. 어느 하나 자연스러운 게 무얼까.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스며드는 것들에 대해서, 부자연에서 ‘불’이 떨어지는 날은 순간 온다.
내가 처음 그토록 겁을 먹었던 건, 칠흑의 어둠 속에 어떤 얼굴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사람들은 알까? 어쩌면 시골일 수 있는 전라도 장수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과거의 아픔을 산책으로 치유하고, 루시와 아이유의 상큼한 목소리에 에너지를 얻고, 일기 같은 글에도 공감으로 다가오는 이웃들에게 위로를 받는 내가 덜 가진 자, 덜 아는 자에서 감히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 가슴이 뛴다는 것을.
‘돌봄’ 교사로 ‘학습지’ 교사로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응석하는 아내로 내 삶이 다져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작가’라고 불린다.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
남의 아이를 가르치며, 나의 가정을 돌보며,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진정, 나는 아주 많은 것을 가진 자이며 아주 많이 아는 자가 되었다.
새로운 목표가 있다면, 김영철이 북촌을 헤매며 지나가다 머무는 카페에서 글을 쓰는 것처럼 산책하다 머무는 동네 카페에서도 영감이 쏟아지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은데 머뭇거리고 있는 예비 작가들에게 ‘나도 했습니다. 일기를 글로 바꾸고, 글을 책으로 만들어 가는 여정에 제가 있습니다.’라고 손을 내밀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