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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Aug 25. 2021

그대는 산책을 좋아하나요

푸른 바람의 주파수, 루시와 함께

나는 산책을 해야만 했다. 그림자가 그려지지 않는 때에 걷고 싶었다. 모든게 아스라한 새벽에 그곳으로 나도 들어갈 때, 나는 이물질이 아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 시간은, 습한 녹음향이 있어 그들과 다른 세계의 존재임을 알아차리기 전에 나는 젖어 스밀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산책을 해야 했을까? 왜 하필 그림자가 없는 때에 걷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니 나의 인생이 그림자였구나. 스무 살에 엄마를 잃고서 울던 그림자, 서른 중반에 수술대에 올라서 두려움에 흐느끼던 그림자,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아픈 과거 후유증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림자였다. 알람 소리를 바꿨다. 우리집은 휴대폰 서비스센터도 되고 심부름 센터도 겸하며 면장님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역할을 해 내느라 어젯밤에 맞춰둔 이른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일은 이 동네를 살면서 자연의 질서처럼 일어난다. 내 하루의 마수걸이치곤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른 시간 초인종 소리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하고 과거로 가는 나를 현실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게 산책이다.


그러나 태생이 게으른 나는 <유유자적, 한량, 느긋> 이 단어들이 나를 붙잡는다. 대여섯 걸음으로 현관문에 닿을 수 있지만, 그 붉은 주술같은 힘에 끌리듯 기어이 거실에 눕고 만다. 카펫에 누워서 원목 탁자를 만지니, 깊게 패인 홈과 함게 새벽 공기가 만져진다. 우리집에는 소나무로 된 원목 가구가 하나 있다. 소나무로 만든 탁자는 무르다. 옆으로 비껴서 보면 눌린 글씨 자국도 보인다.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선산에 소나무를 심었고, 나이가 들어 생을 달리할 때 그 소나무로 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소나무 탁자는 태곳적 무른 성질을 갖고 있다. '유유자적'을 닮은 '연한 의지'를 있는 데로 끌어모아 꾹꾹 누르면 나무는 누르는 데로 나를 받아준다. 어쩌면 이 소나무 탁자조차도 나의 느긋함을 알기에 내 삶의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붉은 주문서를 받고서 여기에 왔는지도 모른다.


기어이 라디오를 틀었다. DJ는 아침 시간대에는 경쾌한 선곡이 대부분이다. 나의 느긋함에 에너지를 주려는가보다. 라디오가 주는 상쾌함으로 차오른 날에 걸으며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루시의 ‘조깅’을 들으면 가만히 있기 힘들다. 내 산책길에서 ‘조깅’이라는 노래는 손가락의 고유한 지문 같다. 톡톡 걷는 걸음이 떠오르고 팔마저 직각이 되어 앞뒤로 흔들게 하는 그 노래에 나는 홀린 듯 일어섰다. 이제 문을 열 수 있겠다.


'몸은 괜히 뻐근하고 오늘따라 괜히 나른하죠. 같은 일상 속에서 하루에 날 위한 시간은 얼마나 있을까?’


‘급하게 가지마. 그렇게 머물러줘. 푸른 바람처럼 그런 너이기를.’


여전히 몸은 뻐근했고, 날 위한 시간은 카펫에, 소나무 탁자에 눌러 굳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연다. 아침바람은 내가 걷는 속도만큼 불어줄 것이고, 밤새 부유하다 들러 붙은 먼지 같은 잡념도 함게 날려줄 것임을 안다. 그러기에 오늘도 더 늦어질 수는 없다. 동트기 전, 내가 녹음향에 녹아들 바람이 아직은 싱싱하다.


'그대는 저처럼 산책을 좋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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