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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산책가 Aug 25. 2021

조용해야 들리는 소리

분홍 하늘의 주파수, 아이유와 함께


산책을 해야 만나는 세상이 있다.


시동을 껐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밤까지 그치지 않았다. 주황 가로등 아래에 빗줄기가 쏟아진다. 흑지에 그려낸 무수한 빗금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눈 앞에도 쏟아지고 한 자 만큼 떨어진 머리 위에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젖지 않는 아늑함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딱 내 머리 한 자 위에서 '낮은 도' 소리를 내며 따라잡기 힘든 무수한 음표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클래식보다 듣기 좋은, 악보없는 음악의 세계. 어느덧 박자가 느려질 때, 그때 차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비가 내린 다음날은 설렐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새 가전제품에 붙은 비닐을 벗겨낼 때, 욕실 거울에 비누 칠을 한 뒤 샤워기로 헹구어낼 때, 내 얼굴의 화장을 지워낼 때, 아차차 이건 아니다. 내 눈알을 씻어낸 듯한 개운함이 있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일찍 자야 한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광고 문구를 믿는 게 절대 아니다. 미인을 좇지 않기로 했다. 다만 산책에서 그림자를 빼고 싶었다. 산책을 해야 만나는 세상은 과거의 그림자를 지우고, 살고 싶게 만든다. 그림자는 ‘검정 거울’ 같아서 오롯한 자연을 탐닉하는데 방해가 된다. 내가 느껴지지 않는 그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게 일찍 일어날 이유인 것이다.


5시 40분, 드디어 일어났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깨어났을 때, 누가 가장 좋아했을까. 왕자? 내가 만든 이야기에서는 공주다. 보드라운 담요의 매력은 어마어마했지만 말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화장실에 들르기를 서둘렀고 물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년에는 안경을 종종 벗고 나갔지만, 오늘은 그림자 떼놓고 가는 첫날이니 덜렁대서는 안 된다. 늘어진 티셔츠를 끌어다 안경도 스윽스윽 닦아냈다.


나가자, 그림자가 나타나기 전에 출동!


구름은 물기를 말끔히 짜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물걸레 정도 되는 걸까? 청소를 깨끗이 해놨다. 트집을 잡을 데가 없다. 창문을 열고 청소하는 집안 공기처럼 온도는 떨어졌지만 기분 좋은 찬 공기였다. 이 정도쯤이야, 신기 마을을 돌 때쯤이면 사라질 거야. 팔뚝에 세워진 빳빳한 솜털은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는 신호쯤으로 여겼다. 선선함이 신선함으로 느껴질 때, 아이유 노래를 찾는다. 비타민 같은 그녀의 노래는 집에서 들을 때와 산책 중에 만날 때, 더 다르다.


툭 웃음이 터지면 그건 너

쿵 내려앉으면은 그건 너

축 머금고 있다면 그건 너

둥 울림이 생긴다면 그건 너


동네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텃밭을 일구는 소리가 10미터 근처에서 들린다. 젖은 흙을 일구는 괭이 소리만 들어도 흙냄새가 느껴진다. 신선한 흙의 온도와 냄새는 부지런한 냄새다. 굳이 괭이질을 보지 않아도 나는 그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동네 어르신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뛴다. 내 아빠가, 엄마가, 할머니가 흙을 갈아엎었고 그 곁에서 땅강아지랑 놀던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산책을 해야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대도 걸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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