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수많은 특성 중 하나일 뿐
예민함은 내 무기다
전엔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다만, 마구잡이로 휘둘러 남을 상처 입히는 무기가 아니라,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무기로 말이다. 이 글은 내가 예민함이 내 약점이 아닌 특성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강점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이야기다.
그래서, 얼마나 예민하시냐면요
아마 스스로 좀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해봤을 그 테스트, 나도 한 번 해봤다. 답은 정해져 있겠지만, 최대한 보수적이고 객관적(이게 가능이나 한지 모르겠지만)이려고 노력해 봤다.
테스트 결과 참고 : https://types.my/hsp/
이 사이트에서는 민감도 점수로 상위 16%에 속하는 사람들을 ‘초민감자’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초민감자들 중에서는 그다지 민감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지표가 하나 있다. 내적 민감성이 상위 1%라는 거다. 점수로는 무려 만점에 해당하는 100점이다. 내적 민감성이 예민한 사람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거의 나를 간파당한 수준이다. 과도한 반추사고와 내적 모니터링, 그리고 기록과 표현 욕구. 나란 인간의 함축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
또 다른 도구를 활용해 봤다.
초민감자(HSP) 자가진단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Elaine Aron의 체크리스트다.
1. 다른 사람의 기분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2. 세부 사항을 잘 알아차린다.
3. 밝은 빛, 강한 냄새, 거친 직물, 사이렌 소리 같은 감각 자극이 쉽게 부담스럽다.
4.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해야 하면 불편하다.
5. 과도하게 자극되는 상황에서는 물러나 혼자 있을 필요가 있다.
6.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7. 예술이나 음악, 자연 등에서 깊이 감동한다.
8. 소음, 혼잡,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쉽게 지친다.
9. 다른 사람의 말투, 표정, 몸짓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잘 알아차린다.
10. 배고프면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기분이 나빠진다.
11.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영화, 프로그램을 보기 어렵다.
12. 몸이 쉽게 놀라거나 깜짝 놀람 반응이 크다.
13. 강한 경쟁, 평가, 감시 하에서 성과가 떨어질 수 있다.
14. 삶의 변화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15. 남들이 불편해하지 않는 감각 자극(예: 의자 재질, 온도, 냄새)에 예민하다.
16. 풍부한 내적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상상이나 사색을 즐긴다.
17. 타인의 고통, 슬픔, 불편함을 보면 오래 마음에 남는다.
18. 동시에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19. 날씨 변화나 계절 변화에 따라 기분과 에너지가 변하기 쉽다.
20. 완벽하게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고 답한 문항이 14개 이상일 경우 초민감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하는 이 체크리스트에, 나는 ‘아니요’라고 확답할 수 있는 문항이 없었다.
MBTI 보고 거르는 사람을 거르라구?
내적인 모니터링 시스템이 늘 가동 중인 난 MBTI분석도 아주 재미있어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십억 명이나 되는 인간을 단 16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또 ‘사람을 알아가기 전에 MBTI로 판단해 버리는 무례한’도 절대 아니다. 16개 유형으로 나누기에 앞서 사람을 외향인과 내향인으로 이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감정과 논리를 양분해서 한쪽은 아예 기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성격’이라는 말로 흔히 사람의 성향[Personality]을 표현하곤 하는데, 학문적으로는 기질[Temperament]과 성격[Character]으로 구분 지어 설명하고 있다. 쉽게 보면 기질은 타고난 것, 성격은 그 기질 위에 후천적으로 쌓아낸 것을 말한다.
MBTI는 기질과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며 형성된 ’성격적 성향‘으로 분류한 결과물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T라서 공감을 잘 못해” , “내가 J라서 좀 강박이 있어” 는 어쩌면 맞는 말일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불안이 높은 기질이다 보니 J가 됐고, J성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계획이 없는 걸 견딜 수가 없더라구!” 가 마냥 헛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 또, “사회적 민감도가 기질적으로 좀 낮다보니 네가 무슨 감정일지 잘 느끼지 못했어, 미안해” 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단, “난 원래 이런 사람이니 꼬우면 너를 바꿔. 나는 바뀔 맘 없어” 라는 의미가 포함된다면 그건 개소리가 맞으니, 걸러도 괜찮다.
내가 MBTI를 재미있게 보는 건, 사람마다 다른 강점이나 취약기능, 선호하는 행동 양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왜 내 감정에 공감 못해줘? 너 T야??’ 라고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구나, T 성향이 강하다 보니 감정적인 방식 보단 논리적인 접근을 선호하겠네‘ 라고 이해하기 위해서다.
또 내가 MBTI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우열은 없지만 경향은 뚜렷하다는 거다. MBTI의 요소들과 기능을 분석해서, 다른 어떤 요소들과의 경향성을 찾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MBTI유형 별 민감도 평균 점수 순위는 정말 내 관심사의 정중앙을 명중했다.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INFJ. 그게 바로 나다.
(그리고 나랑 가장 자주 얼굴을 맞대는 내 반려자는 16개 유형중 15위를 차지한 ENTP이다.)
모든 지표에서 ‘당신은 초민감자’ 라고 지목하고 있는데, 정작 난 아주 오랫동안 그걸 몰랐다. 지금은 이렇게 손쉽게 접근해 볼 수 있는 MBTI도 있고(학계에선 인정받지 못하지만), 비용이 좀 들지만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TCI검사를 받아볼 수 있는 기관도 많아졌다. 만약 이런 도구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해 볼 필요도 못 느꼈을 것 같다. 난 그냥, 사람들이 다 나처럼 생각하고 산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걸 의심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내가 민감하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사람들도 나와 다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