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해서 오히려 좋아
쿨하지 못해 미안해
난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데 나도 예민하고 싶어서 예민한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오늘 했던 얘기를 곱씹으며 이불을 걷어차대는 이런 찌질한 성격을 누가 좋아하겠나. 예민하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지 너무 신경 쓰이지만 애써 무시하고, 쿨한 사람들이 할 법 한 행동으로 가장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애쓰는 내 모습이 얼마나 어설퍼 보일지 상상하면 그건 또 창피해 견딜 수가 없었다. 흉내도 제대로 못 내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혼돈의 시기를 겪으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를 탐구하다, TCI검사[기질 성격 유형 검사]를 받아보게 됐다. 불안과 사회적 민감도가 아주 높은, 전형적으로 예민한 기질의 이라는 결과였다. 결과를 마주하고 나니 체념이 찾아왔다. 의지나 노력이 부족해서 쿨해지지 못한 게 아니라는 답을 얻었는데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쿨한 사람‘으로서의 ’ 재능’이 없다는 낙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거다.
이 무렵의 나는 사춘기가 너무 늦게 왔거나, 갱년기가 일찍 온 사람 같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은 겹쳐 찾아온다. 남편의 근무지 이동으로 주말부부 생활이 시작됐고, 맞벌이 직장인으로 남편과 나누어 지고 있던 두 아이의 육아가 평일 동안은 전적으로 내 몫이 됐다. 불가능한 일정은 아니긴 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정이었다. 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톨의 버리는 시간도 없어야 했을 뿐. 심신이 바닥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살기 위한 발버둥으로 심리상담실과 체육관을 동시에 찾아갔다.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누구나 자기 몫의 불안을 안고 산다
심리 상담사 선생님의 짚어 주신 내가 피곤한 이유는 이랬다.
“흔한직장인님은, 경험이나 관계에서 얻은 언어적/비언어적 신호들을 캐치해 내고 그 안에서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불안 신호로 전환하는 과정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 편이에요.
하지만 모든 불안에 대비할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모든 불안에 다 대비하는 건 지나치게 자기 소모적일 수 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이런 자기 소모적인 방법으로 내가 느낀 불안에 대비했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얻어낸 성취도 많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예민함에 지쳤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했나 보다. 그렇지만, 분명히 자기 소모적인 방식이었고, 또 나를 소모시키지 않아도 되는 곳에까지 무분별하게 소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선생님의 솔루션은, ‘내 몫의 불안은 내가 안고 가야 한다’ 였다. 불안하고 불편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라고 하셨다. 너무 불편하겠지만, 불안을 이겨내는 힘을 기르는 게 수평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도 하셨다.
불안을 견디며 느낀 건, 내 희생은 ’선‘이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희생하길 거부하더라도 상대는 나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상황을 불편해하지 않고 해결이 필요한 상황으로 인식하지조차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바꿀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심리 상담 선생님이 첫 상담 때부터 단호하게 얘기하신건, 상담을 통해 상대를 바꾸는 법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이었다. 이 접근은 운동과도 일맥상통했다.
심리상담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게 됐던 근력 운동은 내 예민함을 ’내 몸을 바꾸는 힘‘으로 활용하는 훈련장이 됐다. 협응력이나 순발력 같은 타고난 운동 신경은 무뎠지만 자극점의 캐치는 예민했다. 또 민감한 컨디션 체크를 기반으로 한 운동 강도, 식사량 조절을 통해 다룰 수 있는 중량을 늘리고 체중을 감량하는 방향을 잡아갔다. 나를 소진시키던 예민함을,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무기로 바꾸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운동에 나의 예민함을 온통 쏟아붓고 나면, 예민한 나도 꽤나 괜찮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지나가는 말로 백수는 운동도 조심해야 된다던 친구 얘기에 공감할 뻔했다.
“내가 좀 찌질하긴 해도 운동하고 왔으니까 갓생이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소진시키지 않는 예민함의 활용을 반복하다 보니, 내 예민함이 좋아졌다. 그리고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이상 부럽지도 않았다.
이제, 예민함은 내 무기다
스스로 예민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예민하단 걸 알고도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너희가 너무 무딘 거야’라고 부정도 해봤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쿨한 척도 해봤지만, 나는 결국 이렇게 찌질하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에 괴로워도 봤다.
지금 내 예민함에 대한 인식은, 그저 하나의 특성이라는 거다. 나는 내 특성을 받아들였고, 활용할 방법을 찾았다. 불안에 견뎌보기도 하고, 때로는 먼저 나서서 불안에 대처하며, 필요한 곳이라면 기꺼이 나를 소진시키기도 한다.
이제 나는 예민한 내가 싫지 않다. 예민해서 오히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