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고츠키에 대한 책을 읽고
내 책장에는 '죽기 전에는 읽겠지?'하는 마음으로 사둔 책들이 꽤 많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미 사둔 책을 볼 때, 아주 오래 살거나, 앞으로 책을 사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이 남은 것 같다...)
'언제가는'이라는 수식어를 단 책이 내 눈과 머리에 들어오기 까지는 몇 단계의 의식(ritual)을 거친다. 우선 책장에서 간택을 기다리는 숱한 책들 중 어떻게 눈에 띄어 책상 위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진 십수 권의 - 조만간 읽으리라 믿고 있는 - 책 중에서 제일 상단으로 옮겨져야 한다. 다시 내 가방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손에서 눈으로, 머리로 간다.
이 책은 그런 의식을 거쳐 이번 주에야 비로소 읽기를 마쳤고, 다 읽은 후에는 후회했다.
'너무 늦게 읽었구나!'
'왜 좀 더 일찍 읽지 않았나?'
나는 30대 초반까지도 비고츠키(Vygotsky)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교육에 관심이 있다고 그렇게 떠들어온 것 치고는, 교육심리 관련 책 중 어디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인 비고츠키를 몰랐다는 것이 무척 부끄럽다. 대학 시절에 교육심리를 공부하고 비고츠키를 알았다면 아마 나는 다른 인생의 경로 위에 서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이 책은 비고츠키의 1차 텍스트가 아니다. 박현진이라는 교육과정철학 연구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2차 텍스트이다. 박사학위 논문이기 때문에 발달이론과 교육철학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全無)하다면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을 들여 읽어볼 가치가 있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 세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다.
인간에게만 고유한 도덕 발달(고등정신 발달)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뤄지는가?
도덕 발달과 심미적 정서(예술)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도덕 발달 및 심미적 정서와 교육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저자는 비고츠키의 초기 연구인 '예술심리학'과 비고츠키의 가장 유명한 연구인 '발달이론(근접발달영역 이론)', 그리고 후기 연구를 넘나들면서 다른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고등정신의 발달이 무엇이며, 어떻게 이뤄지며, 그것을 위해 교육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나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면서 기독교인의 거듭남과 성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질적으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다른 상태로의 전환! 인격의 총체적 변화! 이기적 본성에서 이타적 본성으로의 변화!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거듭남(rebirth, 중생重生)의 다른 말이며, 본질적 영적 성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비고츠키가 말하는 발달에 적용을 하면 흡사 고등정신의 형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비고츠키는 '인간 고등정신의 발달'이 '언어'를 매개로 '교사와의 교감' 속에서 '혼란'을 거쳐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것을 기독교에 적용하면, '중생重生'이 '말씀'을 통하여 '목자의 양육' 속에서 '자기 부인'을 통해 이뤄지는 과정과 아주 닮았다.
나 스스로는 종종 - 타인이 온전히 파악하거나 개입할 수 없는 측면에서 -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속하는 중생을 위해 교회의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표준적이고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마음에 울림을 주고 좀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도록 독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질문은 오히려 여기서 시작된다.
교육은 여기까지인가?
그 이후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와 운명에 맡겨야 하는 것인가?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다른 영혼을 빚어내고자 하는 욕심은 없다. 다만 한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교육이, 교사가 할 수 있는 최전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고츠키의 논의는 그러한 탐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거라는 희망을 던져준다. 비록 그 질문에 대답을 하는 과정이 녹록치는 않겠지만.
저자의 글을 읽고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인간의 고등정신의 발달 상태, 즉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상태가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교육과 수양을 통해 지극히 높은 정신 상태에 이르렀다면 도대체 그 상태는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지극히 높은 정신적, 인격적 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 사람의 삶은 결코 개인적(혹은 이기적) 삶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언급이 없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내면을 탐색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었고, 또 정신적 고양을 위해 분투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온 입장에서 우려되는 바가 분명히 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너무도 질기고 질겨서 이타적 삶, 사랑의 삶이 아닌, 오직 자기 완성의 욕구만으로도 부단히 성장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심지어 이타적 삶을 명시적인 목표로 삼고 달려가다가도 매우 쉽게 자기 완성과 자기 만족이라는 유혹에 빠져 눈이 어두워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나는 교육이, 인간의 고등정신의 발달이, 사랑의 삶을 지향한다는 것을 쉬지 않고 강조해야 하며, 교육자 스스로 매순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교육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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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가 고등정신의 발달을 이끄는 핵심으로 심미적 정서를 제시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정서를 자극과 반응이라는 기계적 구도로 대치하지 않으면서도, 신비한 말들의 향연 속에서 무의미가 될 수 밖에 없도록 버려두지 않는 접근이 마음에 든다. 이 대목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이성(理性)의 최고봉이었다고 할만한 에드워즈가 신앙의 본질을 이성적 진리가 아닌 정서에서 찾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비고츠키의 연구와 연결시켜보면 아주 흥미롭겠다 싶다. (하지만 이번 달에는 용돈이 바닥 났으므로, 에드워즈의 책은 다음 달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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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美)를 진(眞)과 선(善)의 총체로 인식한 것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현대 사회는 감각의 홍수와 욕망의 무한 긍정에 도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美)를 진(眞)과 선(善)에서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결과 지극한 조화와 경외가 사라진 기괴한 형태적 실험만 남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전에 교육의 미래는 진선미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금 그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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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홍우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나 역시 이홍우 선생의 <교육의 목적과 난점>을 읽으면서 빠져들 듯 매력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論議)보다는 현장에서의 변화에서 더 살아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결론이 - 결코 게으른 사고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 언제나 해왔듯 교사로서의 본질에 더 충실하자는 방식으로 끝난 것에 대해서는 좀 아쉽다. (나는 실용주의자인가? 그럴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