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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덕호 Jan 30. 2021

1. 들어가면서

-공동체라디오는 무엇인가?

1. 들어가면서

  -공동체라디오는 무엇인가?


1) 공동체라디오는 미디어다. 

매체를 뜻하는 미디어(media)는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medium’에서 왔다. ‘medium’은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간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mexatu’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디어, 다시 말해 매체는 생산자와 사용자 사이에 존재하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매개하는 중간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미디어는 '매체', '매개체'에 다름 아니다. 단지 중간자이자 매개체였던 이 미디어가 지금은 거대 권력이 되었다. 심지어 제4의 권력으로 ‘제4부’로 일컬어지고 있다. 입법부, 행정부, 사업부에 이어 미디어가 제4부라는 말이다. 거대관료화된 3부를 견제하기 위해 어쩌면 미디어에게 그만큼의 힘을 실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국민들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단지 중간자에 불과했던 매체가 3부를 능가하는 거대권력이 된 것이다. 

미디어는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어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도시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사회가 더욱 복잡다난해졌다. 살롱을 중심으로 정보와 소식을 교환하기엔 이제 도시가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정보와 소식을 전하는 매체의 중요성이 커져갔고, 거대해져가면서 더불어 영향력도 높아졌다. 브르주아계급을 대변하는 매체들은 영주와 지주계급과 싸우기 위해 '표현의 자유'와 ‘객관적 사실보도’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미디어는 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수행하고 있고, 객관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이제 신화에 불과하다. 

신화는 단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미디어는 이해관계가 굉장히 복잡한 사안을 다루고, 전문성을 요하는 정보를 취급하기에 미디어에 접근하기 위해선 역시 ‘전문적’이어야 한다는 신화도 만들어내게 된다. 메시지에 대한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을 봐선 그 전문성을 의심하게 되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다. 

미디어는 단지 매개체이다. 단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중간자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조직을, 조직과 조직을 매개하는 매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보와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누구나 매체에 접근할 수 있고, 매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매체에 접근하기 위한 어떤 장애도 있어선 안된다. 공동체라디오는 바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신화를 제거한, 말 그대로의 매체인 것이고, 진정한 미디어인 것이다. 


2) ‘공동체라디오는 메시지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마샬 맥루한이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한 얘기다. 이 책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안방에서 저 먼 외국의 뉴스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으니 실로 인간의 확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디어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시간과 공간이 축소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감각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것이고, 인간에 의해 사회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메시지에 관계없이 미디어 그 자체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미디어를 접하는 순간 메시지에 상관없이 그 미디어는 직접 인간의 생활과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접하게 될 때 생기는 신체적, 감각적 변화가 미디어가 전달하는 근본적 의미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세상에선 모든 것이 스마트폰으로 연결되고 있다. 전철을 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놀거나 하고 있다.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일상화 되기 전만 하더라도 전철 안의 풍경은 그러지 않았다. 그땐 많은 사람들이 무가지신문를 보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가지신문을 보았으면 전철에서 무가지신문을 수거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렇게 새로운 미디어를 우리가 접하게 되면 그 미디어 자체로 인해 우리의 생활과 정신이 변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미디어를 접하느냐가 현대사회에선 무척이나 중요하다.  

공동체라디오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매우 작은 매체이다. 한 개 기초지자체를 방송권역으로 하고 있는 지역밀착형 매체라서인지 전지구적으로 생활하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관심이 크지 않고 잘 접할 수 없는 매체일지도 모른다. 특히 서울과 같이 지역이라는 개념이 없는 곳에선 더욱 접하기 어렵다. 하지만 공동체라디오를 접하는 순간 마샬 맥루한이 말했던 '미디어는 메세지'라는 개념이 현실처럼 다가온다. 공동체라디오를 만나게 되면 매우 단조로웠던 생활과 정신이 변하게 된다. 공동체라디오를 접하지 않았으면 그 순간 다른 어떤 것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라디오를 만나게 되면 공동체라디오가 전하는 소식과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된다. 공동체라디오를 접한다는 건 단지 소식을 접하는 것 이상이다. 공동체라디오는 청취자들이 수동적인 청취자로, 단지 미디어의 대상으로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적극적으로 청취자에서 제작자로 변화하기를 요구한다. 시민제작자로 PD가 되어보라고도 하고, 라디오진행자가 되어보라고도 한다. 수동적 미디어 소비자에서 능동적인 미디어 생산자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공동체라디오를 만나는 순간은 바로 이 때다. 이 때가 맥루한의 ‘미디어는 매세지다’라는 말이 가장 극적으로 의미를 발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공동체라디오의 시민제작자로 새로운 생활과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라디오를 만나지 않았다면, 공동체라디오에서 활동하거나 공동체라디오를 듣지 않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바로 ‘미디어는 메세시'가 현실이 되면서 '공동체라디오는 메시지'가 된다. 공동체라디오가 전하려 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공동체라디오는 단지 미디어에 불과하지 않다. 공동체라디오는 개인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3) ‘공동체라디오는 창이다.’

언론을 ‘세상을 향해 나있는 창’이라고 한다. 언론이 사안을 어떤 시선으로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수용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미디어는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창으로 기능한다. 우리가 창밖 세상을 바라볼 때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 창을 통해 바라본다면 세상은 뿌엿게 보여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곡되어 보이는 창으로 본다면 역시 세상은 왜곡되어 보일 것이다. 그럼 투명하고 깨끗한 창으로 본다면 세상은 바로 보일까? 이 경우 창으로 보이는 세상은 깨끗히 보일 것이다. 하지만 창으로 보이는 세상 역시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창틀 밖의 더 큰 세상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라는 창으로 보여지는 세상 너머엔 더 큰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 미디어가 아무리 깨끗하고 투명한 창이라 하더라도 창틀 너머 더 큰 세상은 역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디어가 보여주는 대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디어가 보여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없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개념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그건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세상은 세상의 극히 일부이다. 이렇게 미디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공동체라디오는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한 시민들의 삶, 동네 생활, 마을살이를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큰 미디어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그래서 존재하지 않았던, 하지만 무척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전한다. 전국을 대상으로 전하기엔 너무도 사소한 일들이지만 우리 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접할 수 있다. 큰 대중미디어를 통해 들리는 소식은 대개 탤런트나 정치인, 유명인들의 모습이다. 세계적인 사건, 국가적인 뉴스들이다. 시민들의 삶의 모습은 특별한 경우만 등장한다. 대개 사건 사고의 당사자일 때 좋지않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대부분이다. 물론 간혹 미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큰 대중미디어가 보여주는 창에 시민들이 등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민들은 대개 창 밖에 존재한다. 미디어의 세상에 시민들은 극단적으로 말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라디오라는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세상엔 언제나 시민들이 있다. 시민들이 살아가는 알콩달콩한 이야기에서부터 우리 동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특별하지 않은 시민들이 특별하지 않은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러다 보니 늘 '누가 듣느냐'며 청취률로 시비를 당하는 일이 잦다. 이 이야기는 뒤에 해보자.    


4) 공동체라디오는 권리다.

우리 헌법 제2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고 있다. 국민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표현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와 알권리로 이어진다. 국민 누구나 자신의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모든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데 한계를 갖기 때문에 국민을 대신해 언론이 그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언론이 늘 국민의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초기 언론은 거대 권력의 언론탄압과 싸워야했기에 '국민의 알권리를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언론자유를 외쳤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루는 정보가 많아지면서 언론은 거대해지고 권력집단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의 자유이거나 언론 종사자의 자유가 되어 버렸다. 국민은 언론에서 멀어지고 언론의 대상인 ‘시청자’나 ‘청취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표현의 자유의 주체인 국민이 언론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국민이 미디어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국민이 여론 형성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미디어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매스미디어로부터 소외된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미디어접근권(public access right)이 등장한 것이다. 미디어접근권은 국민이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미디어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접근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거대독점기관으로 성장한 언론의 일정 시간을 할애하여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소극적 자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접근권은 기존의 미디어구조를 용인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단지 미디어의 일정 시간을 내어준다는 의미로 힘의 관계는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늘 공허한 외침이 되곤 한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권리(communiction right)가 등장하였다. 커뮤니케이션권리는 표현의 자유의 주체인 국민들이 그 권리를 온전하게 펼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누구나 원한다면 자유롭게 바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다. 특히 지금처럼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이 미디어에 의해 장악되어 있고, 미디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니 더욱 그렇다. 국민들 누구나 미디어를 통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기 위해서 이를 위한 제도와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 그 수단과 도구가 주어져야 한다. 커뮤니케이션권리는 적극적 자유라 하겠다. 

공동체라디오는 소극적 액세스권리를 넘어 커뮤니케이션권리를 실현한 것이다. 단지 일정한 시간을 할애 받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 한계를 뛰어 넘어 시민이 직접 언론을 소유하고, 운영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권리로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실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권리는 우리 헌법에서 선언한 국민의 기본권으로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이다. 공동체라디오는 국민의 기본권인 것이다. 


5) 공동체라디오에도 문지기(게이트 키퍼, Gate Keeper)가 존재한다.

이 세상엔 날마다 무척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개인적인 사소한 일부터 국제적인 거대 사건까지 수도 없이 일어난다. 이웃 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를 알 정도로 단순한 사회에서 이제 세계는 저 먼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알아야 할 정도로 복잡다난한 사회가 되었다. 저 먼 뉴욕과 파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나비의 날개 짓’이 되어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뉴스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사건을 개인이 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 뉴스를 걸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과 개인의 사이에 존재하는, 창으로서의 미디어가 그 많은 뉴스를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 미디어 안에서 그 뉴스를 걸러주는 사람이 바로 문지기, 게이트키퍼( Gate Keeper)인 것이다. 문지기는 잣대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가를 가르는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게다. 문지기가 들고 있는 잣대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뉴스도 미디어에 등장할 수 없다. 이 문지기는 자신이 속한 미디어가 동일한 시선을 유지하도록 역할을 한다. 그 미디어의 색깔, 논조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문지기는 대개 ‘미디어경영자’이거나 상위직 속한 간부들이다. 평사원의 시선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청취자나 시청자는 애초에 문지기가 될 수 없다. 청취자나 시청자는 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공동체라디오에도 문지기는 있다. 공동체라디오도 자신의 색깔을 보여줘야 하기에 문지기가 있다. 공동체라디오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지역도 비록 작지만 날마다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에 문지기 역할을 누군가 하게 된다. 공동체라디오의 문지기는 바로 방송활동가 각자이다. 방송제작에 참여하고 있는 방송활동가인 평범한 시민이 문지기다. 편성원칙에 입각해 방송활동가인 시민이 스스로 문지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라디오는 시민이 만들어가는, 시민이 주체인 방송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 공동체라디오에 문지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따로 둘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너무 적은 인력으로 방송국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문지기 역할까지 수행하기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공동체라디오도 자기 방송국의 색깔을 보여줘야 한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편성이념, 편성원칙’이다. 방송국의 가장 기본적인 취지를 담은 편성이념과 편성원칙에 바탕을 두고 방송활동가가 직접 스스로 문지기의 역할을 해가야 한다. 만약 방송활동가들이 스스로 문지기 역할을 못해 방송국의 ‘편성이념과 편성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방송은 자기 고유의 색깔이 없는 무채색의 방송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편성이념, 편성원칙’도 공동체라디오에 참여하는 방송활동가가 함께 만든다. 시민들이 모여 우리 방송국은 이런 방송국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토론하고 정리하는 것이 ‘편성이념, 편성원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편성이념, 편성원칙’은 불변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참여하는 시민에 따라 바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편성이념, 편성원칙’은 토론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6) ‘공동체라디오는 관계다.’

간혹 라디오를 듣다보면 진행자의 목소리를 타고 진행자와 하나가 되기도 하고, 때론 진행자를 너머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건 단지 라디오만이 아닐 것이다. 월드컵에 출전한 국가대표의 축구경기를 보다보면 환호성이 다른 집에서 들리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인기 드라마나 영화를 본 후 서로 공감하면서 한참을 떠들던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디어를 접하다보면 미디어 너머로 나와 같은 행위를 하거나 공감 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미디어는 콘덴츠(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콘덴츠(메시지)는 이용자에게 전달된다. 사용자에게 전달된 콘덴츠(메시지)는 비로서 새 생명을 부여받아 새로운 관계로 진화한다. 콘덴츠(메시지)가 관계를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콘덴츠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용자에게 즉각적으로 반응을 일으키며 미디어 너머에 존재하는 메시지 생산자와 또 다른 이용자를 떠오르게 한다. 이 순간 미디어를 소비하는 행위는 단지 개인 공간에서 행해지는 사적인 소비를 뛰어넘는다. 미디어로 연결된 거대한 공간에서의 공적인 행위로 전환된다. 우리가 지금 같은 시간대에 함께 살며 서로 공유하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공감하게 된다. 이렇게 이용자와 생산자는 상호작용하면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서로 단절되고 고립된 생활자들이 많은 현대에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미디어가 수행하게 되며 개인 간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 관계는 향후 어떻게 이용자들과 신뢰와 관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더 깊고 끈끈한 관계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인기 라디오 진행자나 인기 연예인에게 열성적인 팬들이 생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좁은 지역을 방송권역으로 하는 공동체라디오는 그래서 미디어를 뛰어넘는 관계로, 네트워크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공간적인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공동체라디오는 관계라는 명제를 넘어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지역에서 이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진정한 공동체라디오라 하기에 부족함이 많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은 관계'라고 했듯이 '공동체라디오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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