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유명인의 죽음에 점점 무감각해졌을까
요즘 누군가의 죽음을 봐도, 특히 누구나 알 법한 사람의 소식을 들어도 예전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타깝다기보다, 멍하니 스크롤을 넘기거나 무표정하게 뉴스를 닫는다. 심지어 먼저 드는 생각이 이런 거다. "그만둘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죽었을까?"
이건 단순히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냉정한 사람이 되어서도 아니다. 이건 사회가 우리에게 "공감하지 않는 기술"을 가르쳐온 결과다.
한국 사회는 유명인을 상품화했다. 관심, 소비, 노출,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자산이다. 그들은 주목을 먹고살고, 그 주목은 돈이 된다. 광고, 예능, 루머, 논란, 모두 자산화된다. 하지만 그 주목은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그 관심이 사라지면, 버려진 상품처럼 취급된다.
누군가 고통을 말해도,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멘탈이 약했네." 이런 반응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그들이 누린 보상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하루 12시간을 일하면서, 대출과 물가에 허덕이고, 때로는 아파도 병원 갈 시간조차 없는 삶. 선택지는 없다. 그냥 버티는 수밖에.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유명인이 힘들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진심으로 들리기 어렵다. 고통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명인의 죽음에 냉소적인 반응이 옳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구조에서 공감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걸 말하는 거다. 사람들은 이제 감정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배웠다. 무한하지 않은 감정을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써야 할지 계산하게 됐다.
공감이 사라진 게 아니다. 구조가 공감을 소진하게 만들었다.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공감을 낭비하고, 왜곡하고,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의심한다. 이건 정말 내가 느끼는 감정인가? 아니면 이렇게 느껴야만 하는 건가?
공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걸 꺼낼 여유도, 방향도, 기회도 사라진 거다. 지금 필요한 건 감정의 복원이 아니라, 감정을 망가뜨린 구조를 다시 묻는 일이다.
누구에게 감정을 써야 하는가? 그 기준은 누구에게 맡겨져야 하는가? 유명인의 죽음 앞에서, 대중의 무표정이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도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직면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무관심한 존재가 아니다. 무관심하도록 길들여진 존재들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