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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드람희 Apr 02. 2024

단팥빵집에서

 아무리 봐도 예산이 부족하다. 태어나서 가장 멀리 가는 여행이라 비행기 삯도 생각보다 많이 들었고 여행지의 물가도 너무 비쌌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 지금이 아니면 가기 힘든 곳으로 여행을 다녀와봐야겠다고 생각한 세하는 세계지도를 보다가 무심코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에 꽂혔다. 혼자는 가기 힘든 여행지라는 생각에 여행자들로 꽉 찬 네이버 카페 중 한 곳에 가입하고 운 좋게도 원하는 여행일정에 동행자도 쉽게 구했다. 이렇게 멀리 간 적이 없던 터라 아쉬움에 아이슬란드로 가는 길에 유럽 중 한 국가를 경유하기로 결정했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보니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여행 경비가 100~200만 원은 모자랐다. 지금 하고 있는 빵집의 아르바이트를 여행 전까지 하고 비상금까지 털어도 최소 100만 원은 모자랐다. 다시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여행 일정을 바꾸거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오후나 저녁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여행 전까지 다른 단기 알바를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오전 빵집 알바를 끝내고 집에 온 세하는 알바 사이트를 들어갔다. 단기알바를 검색해 보니 단팥빵을 전문으로 파는 작은 빵집에서 저녁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고 있었다. 기간은 1~3개월. 딱 적당했다. 바로 전화를 하고서는 면접을 보러 갔다. 작은 단팥빵 전문점의 사장님은 지금이 수능 전 하반기라 알바가 하도 안 구해져서 단기로라도 아르바이트생을 급하게 구하고 있다고 했다. 세하는 여행 전까지 3개월의 시간이 남은 터라 여행 전까지는 알바를 하겠다고 했고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집 근처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딱히 좋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세하는 집 근처에 있는 빵집 두 군데에서 오전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완전 빵순이였다.

 그렇게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두 탕씩 뛴 지 1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석복 씨와의 점심식사 이후로 세하는 석복에게 호기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몇 주째 별다른 시그널은 없었다. 역시나 그저 감사함의 표시였구나 싶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호흡도 잘 맞았고 손님이 없을 때 나누는 소소한 잡담도 즐거웠다. 운동을 좋아해서 매일 운동을 하러 다닌다는 것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동식물에 관심이 많은 것도 비슷했다. 세하는 석복과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어도 친한 친구로, 친한 오빠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물론 그전에 석복이 이성적인 어떤 시그널을 보낸다면 거기에 맞게 응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석복은 언제나 똑같았다. 한결같이 친절했고 밝았고 자신감 있었다. 세하에게 호감이 있는지는 알기 힘들 정도로 매일이 비슷했고 한결같았다.

 화창한 목요일, 오전 아르바이트를 끝낸 세하는 오후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에서 쉬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6시 저녁 아르바이트를 나섰다. 단팥빵 전문점은 빵 종류가 5개뿐이라 매우 편했다. 저녁 8시 이후에는 손님이 거의 없어서 주방 청소와 포스기 마감만 잘하면 여유 있게 보낼 수 있었다. 이 날도 세하는 평소처럼 8시 반쯤 주방에 들어가 바닥을 닦고 빵 트레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빵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세하는 큰소리로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빵트레이를 손에 들고 얼굴을 내밀어보니 손님이 보였다. 굉장히 익숙한 뒤통수가 지나갔다. 오석복 씨였다. 이 시간에 석복이 여긴 왜 온 걸까? 세하는 석복에게 단팥빵집에서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뭔가 민망할 것 같기도 했고 딱히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팥빵과 단팥소보루를 고른 석복은 카운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인사할지 안절부절못하던 세하는 후다닥 매장 포스기 앞으로 달려갔다. 세하의 얼굴을 본 석복은 놀란 표정이었다.


"여기서 일해요?"

"아... 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어쩌다 보니 빵집만 두 곳에서 일하고 있네요."

"저기랑 여기 경쟁사인데~ 세하 씨 스파이네요?"

"아니에요. 저 여행 경비가 모자라서 급하게 구하다 보니 여기서 얼마 전부터 저녁에 일하게 됐어요."

"멋있어요. 뭐든 열심히네요, 세하 씨. 저 여기 빵을 사실 저희 일하는 빵집보다 더 좋아해서 가끔 여기 단팥빵 사러 와요. 여기 맛있잖아요!"

"맛있죠? 저도 여기 일하면서 처음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어쩌다 여기서 또 얼굴을 보네요. 저도 놀랐어요. 마감시간 다됐으니 이거 꽈배기 서비스 넣어줄게요. 어차피 남으면 다 폐기라 제가 다 먹거든요."

"오 고마워요. 몇 시에 마쳐요? 아르바이트 끝나가면 같이 걸어갈까요?"

"아 아직 한 시간 더 해야 해요. 얼른 집에 가서 단팥빵 먹어요."

"네, 그럼 내일 아침에 봐요! 거기선 비밀로 할게요!"

"네... 뭐 그래주시면 편하겠네요!"


  석복이 나간 후 세하는 한동안 멍했다. 별일 아닌데 혼자 너무 놀랐던 것 같았다. 여기서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하기야 다 같은 동네다 보니 마주치지 않을 리가 없기도 했다. 매일 보는 석복을 저녁에 또 보니 더 반갑기도 했다. 같이 집에 걸어가면 좋으련만 시간이 도와주질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얼른 주방정리와 매장 마감 정리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우연찮게 석복을 보니 마음이 더 싱숭생숭했다. '나만 석복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석복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빨리 흘러 아이슬란드로 어서 떠나보고 싶었다. 그때가 되면 아르바이트도 끝나고 석복과도 못 보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뭔가 마음이 확실해질 것 같다. 그때까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뭔가 결론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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