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서 인류애로> 4장 요약
광범위한 차별금지 조례 통과와 소도미법 폐지는 발전된 인권의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기독교 보수주의자는 적잖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골적인 혐오를 내세운 사법투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수주의자들은 느낀 것이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이러한 형세변화는, 보수주의자들의 전략적 선회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들은 혐오를 수면 아래에 놓았을 뿐이지 여전히 혐오정치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이들의 구호가 명시적인 혐오에서 “특권이 아닌 평등을 달라”(153쪽) “혐오는 전통적 가족가치가 아닙니다”(155쪽)라는 등 예전보다 세련된 어투로 진행되는 것은 전략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설퍼 보인다. 제프리 베일리스가 말하듯이 “전통적 가족가치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특정 집단에 반대하는 대신 친가족적 행동을 하는 편이 나은 것”(151쪽)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주의자들의 이러한 ‘평등한 권리’ 논증은 우리나라 내에서도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 차별을 금지하는 몇 가지 논쟁점에서 역차별 혹은 특권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요약본에서 말했듯이, 합리성은 그 자체가 하나가 아니다. 상황적 합리성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스바움이 말한 역사적·사회적 영역에 속하기도 한다.
드라마가 펼쳐지는 4장은 수정헌법 제2조를 무대로 한다. 이 소송은 세 개의 개별적인 법 이론과 관계되어 있으므로 매우 복잡하다. 4장은 어느 때보다 꼼꼼한 독서를 요구한다.
수정헌법 제2조는 합리적 근거뿐만 아니라, 특정 집단을 배제함으로써 얻는 ‘압도적 주의 법익’을 증명해야 한다. 물론, 예비적 금지명령을 신청한 원고의 중심전략은 다른 곳에 있다. 원고는 수정헌법 제2조가 합리성기준조차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엄격한 심사 기준이 필요한 법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원고의 전략을 천천히 검토해보자.
a) 평등보장조항을 활용한 방법
수정헌법 제2조를 엄격한 심사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평등보장조항을 활용한다. 우선 이와 관련된 내용을 잠시 참고하자.
평등보장조항에서 어떤 집단에게 가해지는 체계적 불이익을 뿌리 뽑겠다는 생각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 만큼 이 조항은 위계질서나 차별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특별히 높은 법령을 심리할 때 엄격한 심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돼왔다. 다시 말해, 이런 구분들은 평사이보다 더 강력한 근거로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위헌의 의심이 가는 차별’이라 불리는 이 구분은 ‘합리성기준뿐만 아니라 훨씬 더 엄중한 시험도 통과해야 한다.(86-87쪽)
평등보장조항을 활용하여 수정헌법 제2조가 예속정치, 위계정치를 강화시키는 법안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ⅰ) 성적지향에 따른 구분을 위험의심차별이라고 주장하는 방법
ⅱ) 구체적으로 열거하지는 않았지만 평등보장조항에 내재된 기본권
원고는 두 번째 전략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그와 관련된 판례(인정관련)에 근거를 두었다. 그리고 콜로라도 주 대법원은 원고가 제시한 판례들은 모두가 인종과 관련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핵심은 인종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핵심은 평등보장 조항이 “정치적 절차에 평등하게 참여할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독립적으로 식별되는 집단의 참정권 행사 능력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법의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누스바움은 이 주장을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하나의 해석적 난점, ‘독립적으로 식별되는 집단’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을 지적한다. 분명 판례의 맥락상 차별금지법에 보호 받고 있거나 그러한 혜택을 받아온 집단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식별되는 집단’이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적으로 식별되는 집단에 누구를 포함/배제할 것인가는 문제의 핵심이다. 예컨대 아직도 많은 주에서는 범죄자에게 투표권을 박탈하는 법이 남아 있다. 투표권이 평등보장조항이 내재하는 기본권임을 알고 있는 만큼, 이 범죄자들은 ‘독립적으로 식별되는 집단’이 아닌 셈이다. 만약, 동성애적 지향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을 범죄자(유죄판결)로 볼 수 있다면, 이들도 배제될 가능서도 있지 않은가. 누스바움이 주종하는 것은 바로 이 모호함이다. 누스바움은 전에도 말했지만, 판사 재량에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의 모호성은 법리해석에 있어 위험하다.
3절에서는 특별히 요약할 만한 내용은 없다. 간략하게 전체적 흐름을 얘기하자면 이렇다. 원고들은 ‘위헌의심차별’(2절에서 나타는 원고의 첫 번째 전략)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기각된다. 이유는 위헌의심차별의 전통적 세 가지 기준 중 한 가지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ⅰ) 차별의 역사: 원고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고 받아들여짐
ⅱ) 정치적 무력성: 게이나 레즈비언들이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원고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음
ⅲ) 집단을 구분 가능한 특성의 불변성: 동성애적 지향이 불변하는 주장역시 일부 받아들여짐
결국 재판은 수정헌법 제2가 강력한 주의 법익에 봉사한다고 점을 증명하는 주정부의 시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여섯 가지 흥미로운 주장을 하지만, 대부분 기각된다. 이에 대한 서술은 한 번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콜로라도 주정부는 주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위헌판결을 받는다. 이에 미국연방대법원에 상고함으로써 드라마의 3막이 열린다. 물론, 결과는 위헌판결이다. 하지만 콜로라도 주정부의 논의를 파훼하는 방법은 주목할 만하다. 우선 케네디 대법관은기본권을 제한하는 ‘자격박탈’을 분석하는 데 대부분의 의견서를 활용한다. 즉 ‘특권’을 부정할 뿐이라는 콜라라도 주 정부의 의견을 거부했다.
이 법의 영향을 받는 법적 지위의 변화는 전면적이며 포괄적이다.……주법에 의해 동성애자들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고립된 집단으로 구분되어 거래와 관계 맺기에 제약을 받게 된다.(167쪽)
이 법은 특정 집단의 인생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권리들을 박탈하며, 이러한 박탈은 법의 제정 목적과 전혀 일관되지 않는다.(같은 쪽)
케네디 대법관은 ‘자격박탈’ 그러니까 2절에서 확인했던 ‘독립적으로 식별되는 집단’의 필연적인 포함/배제를 인정한다. “대부분의 법률이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든 구분하며 그 결과로 구분된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는 점”이 대부분의 사법체제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법이 기본권과 위헌의심차별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특정한 합법적 목적과 합리적 관계가 있는 경우” 전형적으로 그 법은 존치된다. 그러나 굳이 위헌의심차별조항을 활용하지 않더라도, 수정헌법 제2조는 해당 법의 ‘제정 목적’과도 전혀 일관되지 않는 법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가 있다. 수정헌법 제2조의 위헌이 전면적인 권리 침해라고 본 케네디의 접근로는, 그물 망이 조금은 넓은 인상을 준다. 보다 지엽적인 권리일 경우 여전히 합리성 기준으로 인해 박탈 가능성이 있다. 누스바움이 계속해서 ‘엄격한 심사(위헌의심차별)’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누스바움은 수정헌법 제2조의 접근 방법이 광범위한 불이익이라는 예외적인 사건 일부에만 적용 가능했기 때문에, 위험의심차별을 활용한 접근로를 탐색한다. 이 접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a)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은 그 자체로 위헌의심차별이라는 주장
b) 성평등 접근: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이미 중간 정도의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하는 기준이다.
누스바움은 첫 번째 방법을 “솔직하고 단순한 접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반복적으로 실패해왔다. 앞서도 살펴본 것과 같이 위헌의심차별의 전통적 기준 중 ‘정치적 무력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몇몇 이론가는 다른 우회로를 찾는데, 그것이 ‘성평등’이라는 관점이다. —“젠더와 관련된 구분은 중간정도의 엄격한 심사” 혹은 “준-위헌의심차별”으로 분류된다— 인종 간 결혼금지법과 성적지향과의 유비관계를 성립시키며, 동성애에 대한 깊은 편견이 가부장적 통제와 연관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지만, 남성동성애(게이)에 대한 더 강력한 제제가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 반동성애 운동이 게이에 대한 편견은 “가부장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는 자신의 신체가 ‘뚫릴’ 수 있다는, 신체적 취약성”에 근원을 둔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성애 반대운동에서 레즈비언이 무시되어 왔따는 사실 또한 코플먼의 이론과 조화과 되지 않는다.
분명, 코플먼의 주장은 힘이 있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더 강한 보호를 위해선 부족한 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스바움은 다시 “솔직하고 단순한 접근”에 초점을 맞춘다.
결국 누스바움이 파훼해야 하는 접근로는 ‘위헌의심차별의 전통적 기준’이다. 그녀의 선택은 게임의 법칙 내에서의 탈출구가 아닌, 바로 ‘전통적 기준’에 대한 의문제기이다. 전제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누스바움은 “어떠한 차별의 기준을 엄격히 심사할 때 차별의 역사를 한가지 기준으로 삼는 까닭은” 이 역사로 인해 인식의 기준 자체가 오염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서 모든 편견의 구조는 이러한 차별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는 얘기다. 만약 ‘역사적 차별’의 제1조건이 된다면, 그 차별의 역사로 인해 정치적으로 무력해진 집단은 충분히 위헌의심차별의 충족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차별받고 곡해된 편견구조로 인식된 집단은, 오늘날 정치적 운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압도적 편견과 고정관념의 표적이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대한민국 내에서 여성은 정치적으로 무력하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오해와 편견구조가 뒤범벅된 차별구조를 받고 있다.
또한 ‘속성의 불변성’이란 기준은 어떤가. 만약 인종차별·성차별에 있어서 해당 속성을 바꿀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여자인데, 남성으로 바뀔 수 있는 알약을 먹는다고 해서 성차별이 덜 심각해지냐는 물음이다. 여성이 받아온 차별의 역사는 속성의 불변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종교는 선택의 문제이지,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속성이 아니다. 그렇다고 종교에 따른 차별이 다른 차별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물론 이다.
그러므로 성적 지향이 타고난 것인지, 어린 시절에 획득된 형질인지, 아니면 그보다도 훨씬 뒤에 형성되는 것인지는 성적 지향을 엄격한 심사의 대상으로 삼을지 여부와는 관계가 없을 수 있다.(176쪽)
속성의 불병성은 논점을 흐리게 만든다. 밀의 주장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바로 ‘자기본위적’ 행위라는 개념이다. 선처적이든 후천적 선택이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주권자이다.
속성의 불변성에 대한 중요한 논증이 뒤이어 따른다. 본문 177쪽 브레넌 대법관의 다수의견을 참고하도록 하자. 이 다수의견에서 중요한 것은 ‘속성의 불변성’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당 속성이 당면한 목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선천적 재능이라고 여기는 몇 가지가 있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 재능을 근거로 하여 다른 이들에 비해 유리한 선별조건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차별인가. 여기서 누스바움의 핵심은 바로 편견구조와 속성의 불변성이다. 다수의견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이라는 속성과 사회에 기여할 ‘능력’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과거 이 관계가 성립되었던 이유는, “여자는 무능하다”라는 고정관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 178쪽을 참고하길 바란다.
결국 누스바움이 속성의 불변성은 위헌의심차별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속성의 불변성 또한 유도된 속성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 설정 또한 논점을 흩뜨리고 있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바로 그러한 속성이 삶에 있어서 중요함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앞서 장에서 보았듯이 성적지향은 정체성과 자기표현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내밀한 영역이다.—하지만 논의에서 불변적 속성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종교의 사례를 보았던 것처럼, 삶에 있어서 내면적이고도 중요하지만 불변하지 않은 속성도 있기 때문이다—
불변성이라는 법적 개념은 그 자체로 혼란스럽지만, 이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엄격한 심사의 대상을 정하는 데 쓸 만한 훌륭한 다른 기준을 둘이나 얻게 된다. 즉, 목적과의 관련성이라는 개념과 인격에서의 중심성이라는 개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할 대, 성적지향은 엄격한 심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매우 강력한 속성이 된다.(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