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mplexArea Apr 18. 2018

[독서노트] 샬롯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독서리서치클럽 '히스테리안' 2기 [미칠 撚]  독서 노트

19세기 여성문학사를 다루는 연구서 중 고전으로 손꼽히는 책이 있다. 처음 이 책에 흥미를 가졌던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는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이미지가 주는 기괴함에 이끌렸다. 자연스럽게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표현을 은유로 받아들였고 19세기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대한 묘사, 그 폐쇄적이고 을씨년스러움을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절대 은유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당대의 많은 남성이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써 ‘정신의학’을 도구로 활용하였고, 이 모든 억압적 행위가 과학(지식)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행되었다.      


정신과 진단은 아내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다고 느낀 남편이 아내를 정신병원으로 내쫓고도 아내를 지배할 수 있는 합법적 방편이었다. (중략) 자비스 박사는 여성 정신병의 일차적 원인으로 지나친 공부, 실망, 슬픔으로 꼽았다. (중략) 다시 말해 여자들은 언제 건 정신병이라는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라나 톰슨, 『자궁의 역사』)  

   

「누런 벽지」 의 저자 샬롯 퍼킨스 길먼도 남편과의 갈등으로 인한 신경쇠약을 앓아 정신과 의사 미첼에게 ‘휴식요법’ 치료받았다. 길먼은 이 치료법으로 남편과 갈등을 빚게 되며 이때의 경험이 「누런 벽지」에 녹아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누런 벽지」는 길먼의 일기이자 자전적 소설이다.

이 단편의 내용도 ‘휴식요법’과 관련된 것인데, 치료의 요점은 이렇다. 여성의 신경쇠약은 ‘여성적 영역’에서 벗어난 어떤 시도, 즉 과도한 정신적 활동에 의한 육체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누런 벽지」의 화자 또한 남편이자 의사로부터 같은 처방을 받는다. “존(남편)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내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며 “그는 내가 한 자라도 쓰는 걸 싫어”했다. 

자연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결여’로 설정되어 있으며 ‘자궁’이라는 특수한 기관으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결함을 지닌 존재로 기술된다. 이 두 가지 황당한 주장은 신화적 정당성(도덕적 정당성)과 합리적 정당성(과학적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활용되었다. 서구 2000년을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지배적 여성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인간(현실태/완성태)은 남성으로 전제되어 있다. 인간의 형상이 남성의 정액으로써 전달되고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극히 ‘수동적 모체’로만 받아들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전통에 따르면 여성은 약하고, 화를 잘 내며, 질투가 많고,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반면에 남성은 용기 있고, 사려 깊으며, 냉정하고 유능했다. 르네상스 과학은 이런 성질이 여성 체액의 구조상 필연적이며 운명적인 것임을 입증하려 했다.(조르주 뒤비 외,『여성의 역사 3 – 하』)     
여성은 냉하고 습한 체액을 가졌기 때문에 여성의 난소도 남성보다 냉하고 생기가 없다는 것이다. 또 이처럼 냉한 것은 물건을 수축시키고 단단히 죄므로 여성의 난소는 태양이 없으면 절대 꽃이 피지 않듯이 안에 숨겨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무능하고 허약하고 규정된 여성의 신체는 동물과 남성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계층적인 견해에 딱 들어맞았다. (『여성의 역사 3 – 하』)     


이후 서유럽 사회는 근대로의 진입을 거치면서 과학혁명 거친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고대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이뤄지지만 여전히 그 잔재가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여성’ 담론이었다. 여전히 “지나친 공부는 여자들의 성욕을 억누르고 아름다움을 앗아가며 히스테리, 신경쇠약, 소화불량, 난시, 생리불순을 일으킨다. 교육받은 여자들은 아이를 쉽게 낳지 못한다. 공부를 하면 골반의 발달이 지체되고, 태아의 두뇌 발달이 촉진되어 태아의 머리가 커지기 때문이다”(『자궁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이러한 진술에서 발견되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이 곧 ‘자궁’과 등치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크는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끝없는 불행에서 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선언했지만 여자들에 대해서는 생식 기능만을 강조해 모순을 보였다. (중략) 국민들이 생식 능력에 영향을 미칠 만한 요소 가운데 프랑크의 시선을 비켜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중략) 젊은 여자들이 코르셋을 비롯해 임신 능력을 훼손하는 의상을 착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궁의 역사』) 


여성이 기관으로 환원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여성은 자궁이다”(18세기 프랑스 근대 역사학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쥘 미쉴레의 문장)는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근대 교육의 고전이라고 손꼽는 루소의 저작(『에밀』, 『인간불평등의 기원』)에서도 여전하다. 『에밀』에서 교육의 대상은 남성-에밀이며 여자-소피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의 역할은 아주 제한적인데, 남성을 내조하는 한에서만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무(여성은 이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이외에 여성이 알아야 하는 유일한 지식은 여성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특히 남편에 대한 지식뿐이며, 이러한 지식은 감정에 기초해야 한다. 루소는 단정적으로 여성에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여성이 배워야 할 유일한 책으로 다른 ‘학문’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여성의 역사 3(하)』)     


여성이란 사실만으로도―이 표현 자체도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잠재적 환자가 된다. “비슷한 병력을 가진 남녀가 가슴 통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다면, 심인성 질환으로 진단받을 확률과 생식기능에 관한 질문을 받을 확률은 여자가 남자보다 높다.”(『자궁의 역사』) 「누런 벽지」의 화자가  “존은 평생에 한 번도 신경과민인 적이 없었던 것 같다”라며 중얼거리듯이 말할 때 이 목소리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억압적 체계 바깥(한계)에서 흘러들어오는 배제된 존재의 목소리다.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마녀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무지로부터 여성은 돌아온다. 밑으로부터, '문화'가 못 미치는 곳으로부터….”(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엘렌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를 선언했을 때 최우선으로 복원돼야 하는 것은 바로 여성-자신의 신체이다(“여성은 자신을 글로 쓰면서 여성은 여성의 육체로 귀향할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육체로의 귀향’의 방법론으로 ‘여성적 글쓰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두사의 웃음/출구』전부분에 걸쳐서 엘렌 식수는 여성만의 고유한 ‘언어’를 창안하는 게 주된 목표라고 하며 주요 이론적 대척점으로 정신분석을 세운다. 이미 수많은 담론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바이지만 우리의 몸은 ‘이미’ 사회적 몸이다. 즉 특정 권역 하에서 몸은 해석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 몸으로 승인된다. 이 말이 시사하는 것은 정신/육체가 서로 다른 기원을 둔 절연된 두 요소가 아닌 상호구성적인 경계적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엘렌 식수는 언어적 전회를 통한 변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경향이 짙다.  

    

“펜은 자지의 은유인가”(『다락방의 미친 여자』) 

    

라틴어 어원을 둔 종래의 팔루스(남근/phallus)라는 표현 대신 날 것 그대로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남성적 영역의 고유대명사인 ‘글쓰기’를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펜은 남근의 상징이므로 여성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가능했었다(편지 및 연애소설). 이런 배경에서 19세기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여성 작가/저널리스트는 ‘글쓰기’라는 남성적 영역에 출몰한 하나의 괴물로 취급되었다. 이 시기 여성 작가들은 ‘말하는 메두사’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말하는 메두사’와 대조되는 하나의 이미지가 부상하기 시작하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가정의 천사’ 즉, 모성애적 가치가 정상적 여성성의 범주로 등장한다. 19세기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대로 여자들을 코르셋에만 가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집’에 가둔 시대이다. 「누런 벽지」의 존 또한 화자를 설득할 때 자신(남편)과 아이(자녀)를 강조하곤 하는데, 이는 화자의 주장을 묵살시키는 데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프레임이다(어머니로서의 목소리는 승인되되, 욕망을 지닌 주체로서의 목소리는 지워진다). 즉, 여성의 신체는 자기 것이기 이전이 이미 ‘가정’이나 ‘국가’의 소유물이 된다.     


19세기에 ‘진정한 여성’은 가정, 가족, 자녀라는 본연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자들이 세상에 나온 것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였고, 어머니가 되지 못한 여자들은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황폐해졌다. (『자궁의 역사』)     
여성에게 그것도 임신과 출산과 관련하여 권리가 주어진다는 점은 쉽게 용인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술하였듯이, 재생산이야말로 가족이나 친족 그리고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하고 기획하는 데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공동체의 인구학적 과제 해결이라는 선차성을 제치고 여성에게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 그리고 해당 공동체의 법률이나 관습, 종교와 위배되는 국제 인권 규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정옥, 「재생산권 개념의 역사화ㆍ정치화를 위한 시론」)  

   

또 다른 측면에서 19세기 동화가 여성을 추악하고 늙은 마녀와 젊고 아름다운 그러나 미련할 정도로 착한 여자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구성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도덕적으로) 읽혔을 책들이 왜곡된 여성상을 심어주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였다. 환상적 동화에서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잃게 되고, 어떤 공주는 왕자가 키스할 때까지 100년간이나 잠들어 있어야 했다.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마녀는 숲속에서 혼자 살며 금지된 마법을 배우고 실행하는 늙고 추악한 여자이다. 동화 속 남매를 유혹하여 잡아먹으려고 했던 이 마녀는 결국 불구덩이 속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런데 이 전체적 이미지가 ‘마녀사냥’ 모티프의 반복이라면 과장일까? 마녀의 특징적 서술에서 두 가지 중심 가치가 놓여있고 마녀는 그 반대편, 금기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보인다. ‘결혼’하지 않은 독신―남성적 권위에 기대하지 않고 용납될 수 없는 위반적 주체―이거나, 마법으로 대변되는 금지된 ‘지식’의 금단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결혼과 지식이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한 강력한 수단이었다. 페미니즘 저작에서 ‘마녀’ ‘히스테리 환자’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냄으로써 스스로를 영웅의 위치로 등극시켰던 것처럼, 남성은 말하는 메두사를 ‘다락방’에 감금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무식의 소치도 아니고 전근대적 야만도 아니다. 모든 사회마다 특정 배제의 절차가 있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계몽에 의거한 사회개혁이 해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적 반성으로 인해 스스로 조건화된 인식구조를 비판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 ― 그의 힘들과 위험들을 추방하고, 그의 우연한 사건을 지배하고, 그의 무거운, 위험한 물질성을 피해가는 역하을 하는 과정들 ― 이 존재한다. (미셸 푸코, 『담론의 질서』)



 

“내 병증에 관해서 존과 대화하기 정말 어렵다”(「누런 벽지」)

여성은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하나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사회적 언어’가 부재하고 있다는 것과 어쩌다 전해진 목소리마저 귀머거리 남성(사회)은 듣지 못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화자의 목소리에 일체 귀 기울이지 않고 존은 화자의 고통을 ‘판단’하고 ‘결정’한다. 「누런 벽지」는 이러한 의미에서 억압된 목소리가 돌아오는 이중(doble)의 텍스트이다.      


누런 벽지의 무늬가 주 텍스트(dominant text)이고 그 무늬 뒤에 있는 여성은 하위 텍스트(subtext)가 된다(162). 여주인공이 누런 벽지의 무늬를 통해 글을 쓰고 누런 벽지 뒤에 갇혀있는 여성과 동일시하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른 심급에서 보면, 누런 벽지를 찢어 버리고 반복적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는 여주인공과 누런 벽지 뒤의 여성들의 행동들이 행위하는 텍스트들(acting texts)이 된다면, 그 행위를 기술하는 여주인공의 일기는 말하는 텍스트(speaking text)가 된다.
 (김경희, 「히스테리 담론‘들’과 담론적 수행성: 샤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     


작품 초반, 화자는 존의 진단(사유를 포기하라!)을 일정 부분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곧 ‘누런 벽지’의 무늬가 하나의 창살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울긋한 벽지 뒤로 한 여자가 또는 여자들의 ‘머리’가 보인다. 얼굴이 아닌 머리다.     


여자들의 머리가 빠져나오면 무늬는 그들의 목을 졸라 거꾸로 뒤집어서 그들의 눈을 하얗게 만들어버리는 거다. (「누런 벽지」)
벽지는 창살이 된다! 내 말은 바깥쪽 무늬가 창살이 되고 그 창살  안의 여자가 더없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누런 벽지」)
앞쪽 무늬는 실제로 움직이는데, 그게 당연하다! 뒤쪽의 여자가 그걸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누런 벽지」) 
때로는 그 뒤쪽에 수많은 여자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 때로는 여자는 하나뿐인데 그 여자가 빠르게 사방을 기어다니는 바람에 앞쪽 무늬 전체가 흔들린다고 생각도 든다. (「누런 벽지」)
그녀는 줄곧 창살 바깥으로 기어나오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무늬 바깥으로 기어나올 수 없다. 그랬다가는 무늬에 목이 졸리고 만다. 그래서 무늬 속에 그렇게 많은 머리들이 들어 있나보다. (「누런 벽지」)              


목 졸린 여자들의 머리를 본 이후 화자는 벽지 속 여자처럼 기어다니기 시작하며 ‘누런 벽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억압의 현실이 된다. “저 맨 바깥 무늬를 그 안쪽 무늬에서 떼어낼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씩 떼어보려고 한다.” ‘집안의 천사’라는 정상 아내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로의 행위적 이행은 억압된 목소리의 회귀를 증상적으로 보여준다. 

「누런 벽지」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존과 제니(존의 여동생)는 벽지 속에 갇힌 여자,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보지 못한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현실성이다. 히스테리 환자의 환각 속에서 하나의 ‘환상’으로 존재하던 ‘머리’들의 여자가 어느덧 화자를 지칭하기까지 한다. 오히려 비존재의 침투가 존재를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열하는 경계선-화자의 시선은 디아스포라적 시선이다. 그리고 이 단편을 통틀어 단호함이 이토록 묻어져 나오는 말은 없을 것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이 벽지를 건드리지 못한다. 산 채로는 말이다. (「누런 벽지」)


더 이상 “존이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었으면!” 하고 바라지 않는다. 작품 막바지, 누런 벽지를 찢으며 기어다니는 여자는 비존재의 ‘그’여자가 아니다. 남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친 짓(기어다니기)’을 수행한다. “대낮에 기어가다가 발각되면 무척 창피할 노릇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했던 화자가 억압자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비정상’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나는 하던 대로 그냥 기어가고 있었으나 어깨 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나 드디어 나왔어요.” 내가 말했다. “당신과 제인의 반대를 무릎쓰고요. 그리고 내가 벽지 대부분을 벗겨냈으니, 당신이 나를 도로 집어 넣을 수는 없어요!”  (「누런 벽지」)     


「누런 벽지」는 기절해버린 남편을 화자가 기어서 넘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후 그녀의 삶을 상상하는 몫은 독자에게 남겨져 있지만,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절한 남편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신화에 대한 전복, 즉 메두사 신화를 뒤집어 놓은 것은 아닐까? 정복 신화인 올림푸스 신화가 메두사의 머리를 쳐냄으로써 왕좌에 앉았듯이 여성을 주변부에 위치 지음으로써 권력을 향유한 남성-사회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아닐까?  19세기 ‘말하는 메두사’가 다락 방의 미친 여자들이었다면, 돌처럼 굳어 기절해버린 존은 패퇴한 테세우스가 아닐까?  작품 끝자락에서 공포에 질려 돌처럼 굳은 테세우스와 메두사의 미소를 상상해 본다.


독자로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양보 없는 불화의 영역이다. 기괴한 목소리의 회귀 그러나 목소리를 내부화(정상화)시키지 않은 한에서의 윤리적 고찰. 즉 괴물의 머리를 잘라 신화로 등극시키지 않고 정신병을 정상화시켜 ‘퇴원’이라는 화합적 코드를 거부하고 있다. 비록 그 끝에 파국의 잔해만이 남아있을지라도 말이다. 역사의 천사는 파국의 이미지와 함께 있다.  


독서리서치클럽 '히스테리안' 

https://www.instagram.com/hysterian.public/



작가의 이전글 독서리서치클럽 [히스테리안] 모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