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능력주의는 많은 불안의 근원이다. 언젠가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정함. 뒤처진다는 것은 단순히 위치의 이동이 아니다. 세상에서 쓸모가 없어지고 존재의 이유가 희미해지는 것. 게으르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는 것.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을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느낌.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단계 뛰어올라 나도 그들 옆에 있고 싶었다. 땅을 박차고 올라 하늘을 날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랐다. 나는 더! 높이! 멀리! 갈 수 있을 거야.
운이 좋아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인이 되었다. 월세가 자주 밀리고, 당장 대출금을 갚을 수 없던 비루한 생활에서 탈출했다. 지금이 그때보다 행복한가. 나는 어쩌면 쉰이 되기 전에 길에서 객사하게 되지 않을까. 돈이 없으니까 직장이 없으니까 비루하게 가난하게 살다 갈 운명이라 믿었다. 돈을 벌고 모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으니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저 오늘에 집중하며 불확실한 내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불안하진 않았던 것 같다.
'능력주의'는 제한된 부와 권력을 나눔에 있어 사람의 능력(지적 능력, 성취, 노력)을 기준으로 두는 정치철학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능력주의 사회였다.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있고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우리는 좋은 대학을 향한 입시경쟁에 몰두하며 혹독한 청소년 시기를 보냈다. 대부분 사람들이 노력을 하지만 모두가 목표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능력주의는 소수의 성공에 반짝이는 별을 달아준다. 저들을 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남들보다 노력하는 선한 사람들, 사회를 이끌어가는 든든한 영웅들. 반면 성취를 이루지 못한 이들에겐 가혹한 평가를 내린다.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악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성공하지 못한 것은 개인의 무능력이고 도덕적 안일함이 되었다. 개인 또한 사회의 잣대에 맞추어 사람들을 평가한다. 모두에게 등급을 매기고 꼬리표를 달아준다. 자신보다 낮은 등급의 사람들을 보며 안심하고 높은 등급의 사람들을 동경한다. 능력주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 보통 사람들의 통념이 되었다.
회사에 들어오니 모두가 '일 잘하는 사람'을 분류하고 있었다. 소위 '일잘러'들은 절대적 선이다.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회사를 이끌어 나가고 일을 못하는 이들의 몫까지 해내고 있었다. 모두들 일잘러 등급을 받으러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혹시나 일 못하는 사람으로 강등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절대적 선이다. 그렇지만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초에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침에 눈을 뜨면 서둘러 준비를 해 회사로 간다. 회사에서는 책상에 앉아 꼬박 8시간을 컴퓨터를 바라본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 있는가.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씨름하며 쓰고, 보고하고, 고민할 만한 것이 있는가 말이다. 수십 대의 컴퓨터와 책상으로 가득한 사무실에서 일렬로 사람들이 앉아 무언가에 열심인 모습이 기이했다. 전형적인 사무직의 모습. 가끔씩 전화가 오면 로봇처럼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부서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왜 저렇게 알아들을 수 없게 말을 하는 걸까. 나른한 사람들의 표정. 나 또한 그들의 옆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 모습은 인간성이 사라진 공장이나 가축을 키우는 축사에 비견될 정도이다.
가끔씩 누군가에게 인정과 찬사가 쏟아진다. 그는 보고서를 잘 썼거나, 상사가 흡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거나, 업무 점수가 좋았을 것이다. 쑥덕쑥덕, ' 저 사람은 이제 일잘러가 되었어.' 사람들은 부러움과 시기심, 존경심으로 가득 차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감정은 공포가 된다.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니겠지', '나도 칭찬을 받고 싶어' 서둘러 상사에게 보고를 한다. 적당한 칭찬을 받으면 어깨가 한껏 올라간다. 일의 보상은 월급이라기보다 칭찬과 평가이다. 그것이 이곳의 정해진 룰이다. 그래, 역시 일을 잘해야 해. 그런데 정말 일이란 무엇인가. 보고서 한 장과 인사평가 점수에 목매달며 사는 이것이 진정 인류의 과업이란 말인가.
나는 일이 좋아서 하는 거야. 다른 이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의미 있는 하는 거야. 그렇게 내가 쓰고 있는 보고서를, 운영하는 회의를 포장했다. 나는 저들과 달라.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나는 이곳의 룰에 비껴 나 있는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작은 칭찬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비정규직으로 조직의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그저 주어진 일에 집중했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의미를 만들어 싶었다. 일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다는 주위의 시선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은 조직에서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대상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며 정말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확인하려고 했다. 미련하고 거추장스럽게 일을 했다. 결과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주어진 일이 많지 않았다. 나는 온갖 허드렛일을 했는데 그게 좋았다. 태평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흙 속에 굴러다니는 자갈을 긁어모아 닦고 다듬었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전시하며 흡족해했다. 정말 그걸로 충분했다. 어차피 나는 일잘러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비정규직은 애초에 일잘러가 될 수 없다.
그러는 사이 부장이 교체되었다. 바뀐 부장은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조직의 인정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프로 일잘러였다. 그는 어리숙한 나의 말을 곧잘 이해했다. 숨겨진 나의 진심을 읽어내고 호응해 주었다. "그래, **선생님의 말이 맞아" 그가 한때 운동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비정규직인 나에게도 공평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래서 나의 이상한 업무방식을 이해하는 것일까. 스쳐가는 그의 칭찬이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일을 하는 게 더 재미있어졌다. 무엇보다 더 잘해서 그의 인정을 받고 싶어졌다. 능력주의 경쟁에 조심스레 한 발을 올려놓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