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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피렌체의 식전 빵

by 홍아미

[세상만食]


EP 01. 피렌체의 식전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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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먹을 건 많은데, 가장 처음으로 얘기하고 싶은 음식인 식전 빵이라니. 나조차도 조금은 의아하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먹은 식전 빵은 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계기이다.


프랑스의 미식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오를 만큼 위대하다지만, 사실 진정 내 미각 세포를 깨운 건 이탈리아였다. 여름방학 중 떠난 두 달간의 여행에서 오롯이 3주를 이탈리아에서 보냈다. 밀라노부터 시작해 소렌토까지 북부에서 남부까지 여유 있게 도는 일정이었다. 이때, 이탈리아의 매력에 빠져 몇몇 도시는 이후에 여러 번 방문하기도 했다. 피렌체도 그중 하나로, 무려 3번이나 방문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3번일 수 있지만, 한 번 간 곳을 또 가기보다는 가지 않은 곳을 정복(?)하는 유형의 여행자로서 3번은 엄청난 횟수다.


한국으로 오기 전 마지막 여행지도 피렌체였다. 나처럼 파리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였다. 우리의 목표는 우피치 미술관도, 두오모와 종탑도 아닌 ‘먹방’이었다. 당시만 해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라 국내외 가이드북과 현지인의 추천에만 의존해 신중하게 식당을 골랐다. 점심은 노른자의 꾸덕꾸덕한 식감이 살아 있는 진짜 카르보나라를, 저녁은 처음 보는 각종 허브를 뿌려 구워낸 거대한 티본 스테이크를 먹으며 새로운 맛에 눈떴다. 그러다 오래된 동네 식당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찰나의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정확히 어느 식당이었는지, 어떻게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는지, 어떤 메인 요리를 먹었는지 등은 까맣게 잊을 정도다. 그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하고 허름한 동네 식당이었는데, 유럽에 있는 많은 식당이 그러하듯 좁은 공간에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경쾌한 느낌의 빨간 타탄체크 식탁보가 깔려있었고, 음식을 주문하니 작은 바구니에 투박하게 썬 시골 빵 몇 조각이 나왔다.


잠시 옆길로 새면, 소위 ‘식전 빵’은 식사 전에허겁지겁 먹어치우는 빵이 아니라고 한다. 식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따로 또는 음식과 함께 곁들여서 먹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식전 빵으로 통용되고 있다. 어쨌든 뒤돌아서면 허기가 졌던 그때는 그런 걸 따질 여력이 없었다. 먹을 게 눈앞에 있으면 손이 먼저 나갔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친구와 빵을 집어 먹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옆 테이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한 아주머니가 그제야 말을 걸어왔다. “여행 왔니? 빵은 그렇게 먹는 게 아니야.” 처음엔 낯선 이방인을 경계했지만, 아주머니의 푸근한 인상에 금세 마음이 녹았다. 그래도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 아주머니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앉으며 직접 시범을 보여줄 태세였다.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주머니는 먼저 식탁에 놓인 올리브오일을 집어 기포가 송송 뚫려 있는 빵이 흥건히 젖을 만큼 과감히 뿌리더니 그 옆에 있던 소금으로 살짝 간했다. 과정은 이게 전부. 그리곤 먹어보라고 권했다.


반신반의하며 빵을 한입 베어 물었는데,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맛이었다. 씹을 때마다 촉촉한 빵에서 흘러나오는 올리브오일의 녹진한 풍미가 대단했다. 더욱이 소금이 뿌려져 짭조름한 게 입맛을 돋웠다. 반응을 관찰하던 아주머니는 우리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더니 앞으로는 꼭 그렇게 이탈리아식대로 먹으라는 말을 끝으로 쿨하게 돌아앉았다. 그날부터 많은 것을 보태지 않은 심플함의 힘을 믿게 됐다. 올리브밭이 천지인 나라에서 맛없는 올리브오일이 나올 리 없으니 여기에 약간의 소금만 더하면 더 손 쓸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이탈리아에서 먹은 모든 맛있는 음식은 단순했다. 손으로 반죽한 도우에 신선한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모차렐라 치즈를 얹어 화덕에 구워낸 피자나 인근에서 잡힌 생선에 칼집을 내 소금과 후추로만간 한 다음 레몬즙과 허브를 넉넉히 뿌려 오븐에 익힌 생선 요리 등에선 재료의 맛이 온전히 느껴지면서도 감칠맛이 풍부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넉살 좋은 아주머니 덕분에 나의 미각은 단숨에 확장됐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기막힌 인연이자 고마운 은인이다. 어린 마음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건네본다.


Grazie t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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