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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Jun 20. 2020

좋아하던 일을 싫어하게 되면

삶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최근 몇 주간 책으로 낼 만 한 예전 콘텐츠를 뒤적거리다 보니 새삼스레 옛날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내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는지 뭐 그런 생각 말이다. 나의 커리어는 꽤 오랫동안 ‘프리랜서 기자’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내 이름 뒤에는 항상 ‘기자’라는 직함이 따라붙곤 했고, 그것은 내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일에 대한 추억

딱히 그 일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싶어서도 아니었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일한 만큼 돈을 버는 프리랜서이기에 들어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받아서 일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일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남달랐다.  

이제 와 생각하면 우스운 노릇이지만 ‘기자’라는 직업군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허영이 있다. 유력 일간지 기자들과 비교할 바는 못 되겠지만 나 같은 일개 프리랜서 기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뒷돈을 받거나 갑질을 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근래에 가장 핫한 유명인사와 일대일로 대등하게 자리를 같이 한다는 우월감 같은 건-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아주 작은 부분이다. 

이를테면, 취재의 필수 요소인 ‘인터뷰’라는 작업 자체가 주는 쾌감이 있었다. 인터뷰어는 취재원을 고르고 컨택할 뿐만 아니라 사전조사를 통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반면 취재원은 선택당한 입장이고(가끔은 반대의 경우도 있다. 대단한 유명인사들은 매체를 고른다) 인터뷰어의 질문에 일방적으로 답변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얻어진 답변으로 작성된 기사는 대개 취재원에게는 홍보의 수단이나 유명세를 높이는데 이용되므로 묘한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창 인터뷰를 많이 할 때는 한 달에 10~20번을 했으니 십수 년 간 내가 만난 취재원을 헤아리면 천 명 가까이 될 터였다. 나는 그냥 돈 받고 하는 일인데도, 취재원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잘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등등.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크게든 작게든 자극도 받고,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었다. 멋진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 궁금한 것을 실컷 물어볼 수도 있고, 돈도 벌고, 누군가에게 도움도 되고, 감사인사도 받으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직업이 어디 있나 싶었다. 

인터뷰뿐만 아니라 ‘PRESS’ 완장 하나면 어디든 무사통과할 수 있다는 특별함, 기사를 쓰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공짜 음식이나 물건을 남들보다 흔히 받을 수 있는 작은 특혜 같은 것들도 직업만족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장점이 이렇게나 많으니 촉박한 마감,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페이, 계약서조차 없이 갑의 편의대로 결정되는 업무 조건 등등 불합리한 점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랬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수년 전 이 일에 지독한 회의감을 느끼고 그만두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일을, 할 수 있는 한 평생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을, 이 직업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냐며 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준 그 일을, 이제는 싫어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너무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되어버리면 삶의 아주 큰 부분이 공허해진다. 그리고 공허함은 삶을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버린다. 



가치 없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쳤던 허망함

물론 단 한순간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타고나기를 둔감하게 태어난 나의 성정으로는 웬만한 불합리함이나 부조리함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인쇄비가 없다며 다 만든 잡지를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채 당일날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도, 4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청탁해놓고는 마음대로 2P만 잘라 싣고 원고료를 삭감했을 때도. “에이, 이 더러운 바닥!” 한번 욕하고 털어버렸다. 바로 다음에는 글 잘 쓴다는 칭찬에 우쭐해져서는 모두가 다 나를 원한다고 착각해왔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10년이 지나도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잡글쟁이일 뿐이었다. 페이가 오르기는커녕 깎이기 일쑤였고, 그마저도 받지 못해 몇 달씩 밀리는 일이 허다했다. 일할 때는 갑처럼 굴었어도 돈을 받을 때는 철저한 을이었다. 그러다 내가 왜 그동안 사랑받는 프리랜서였는지, 그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한 메이저 여성지에서 만난 M편집장님은 내 글을 가장 좋아해 주셨던 분 중 하나였다. 프리랜서에게는 내부에서 쳐내기 성가신 자투리 기사만을 맡기는 게 보통인데, 내게는 메인 피처 기사를 주로 맡겨주셨다. 새로 창간하는 작은 육아잡지로 옮긴다고 했을 때 함께 하기로 한 것은 내 글을 알아준 그에 대한 의리에 더 가까웠다. 물론 “이번에 잡지 창간하는데 홍기자가 반드시 필요해” “내가 홍기자 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와 같은 칭찬도 한몫했다. 

그러나 어려운 출판시장에서 자본 없는 작은 잡지사가 버티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한 달, 두 달 원고료 입금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편집장님의 입장이 곤란할까 싶어 독촉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나야말로 입장이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메인 특집 기사를 통째로 맡고 있어 매달 100만 원이 넘는 페이를 못 받고 있었는데, 프리랜서에게는 꽤 치명적이다. 내가 연결해준 다른 프리랜서도 원고료가 자꾸 밀리자 아예 나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참다못해 편집장님에게 힘든 사정을 얘기했더니 ‘나는 모르겠으니 사장과 직접 얘기하라’며 발뺌했다. 문득, 눈앞을 가리고 있던 꺼풀이 확 벗겨진 느낌이었다. 프리랜서 시장에서 나의 가치는 딱 거기까지였구나. 값싸고 말 잘 듣는 용병.

반년 넘게 체불한 임금은 결국 돌려받지 못했고, 귀한 인연이라 생각했던 M편집장과도 절연했다. 그저 밥벌이에 불과한 일에 괜한 의미부여를 하고, 자부심에 넘쳐흘렀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자 감당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수치심과 비참함이 몰려왔다. 집안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잡지와 사보들은 100킬로가 넘었다. 수레에 싣고 4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모두 갖다 버렸다. 청탁이 와도 재미와 의미보다는 이해타산을 먼저 따지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어려운 취재는 다 거절했다. 

심한 무력감과 좌절감으로 힘들어하는 날 주변 사람들이 위로해줬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자 내 삶을 구성하던 많은 부분들도 바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 내 커리어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한 여행 콘텐츠 회사의 일을 따내게 되면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전자책으로 새 옷을 입히다

서랍 속에 묵혀두었던 외장하드를 꺼내 그 안에 들어있는 원고들을 살펴보는데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원고료도 받지 못하고 밤새서 썼던 글들. 막상 글을 쓸 때는 그다지 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던 게 사실이다. 취재원의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잘 담을까. 독자들에게 잘 읽힐까.... 오직 그런 생각뿐이었다. 원고를 다시 읽고 있자니 글을 쓸 때의 내 마음이 다시 떠올라 오묘한 심정이 되었다. 

몇 주간 전자책으로 묶어낼 만한 콘텐츠들을 골라 먼지를 털고, 슥슥 닦고 매만져, 새 옷을 입히는 작업을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그래, 좋아하는 일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해서 좋아했던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청춘을 다 바쳐 몰두했던 그 시간들이 없었던 게 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형에서 과거형이 되었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마음을 끌어당기는 일, 하고 싶어서 몸이 먼저 움직이는 일. 그러니까 어쩌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매일을 좋아하는 일로 채우는 것.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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