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食]
EP 02. 밀라노 혼자남의 파스타
이탈리아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지르는 3주간의 여행 전 준비라고는 대략의 코스와 숙소 일부를 정하는 일이 전부였다. 나는 물론 함께여행하는 친구 또한 성격이 꽤 즉흥적인 탓에 이번 여행만큼은 선택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자고 진작에 합의한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싶었지만, 여러모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짧은 논의 끝에 우리는 첫 목적지를 밀라노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의 주도(州都)인 밀라노는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서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흔히 ‘패션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세련되고, 문화・경제・사회 등 여러 측면에서 진보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밀라노를 첫 도시로 고를 당시에는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두오모, 화려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갤러리아, 유서 깊은 스칼라 극장 등 도시 곳곳에서 멋이 흘러넘쳤다.
첫째날 숙소는 카우치서핑을 통해 구한 곳이었다. 가입, 신청, 수락의 절차만 거치면 현지인의 집에서 머물 수 있는 카우치서핑은 여행 경비를 절약하면서 현지인과 소통하며 여행지의 생생한 삶을 잠깐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기회가 된다. (물론, 단순히 돈을아끼거나 불온한 만남을 기대하는 등 악용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지만. 늘 선택은 자기 자신의 몫이다)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기 위해 도심에서 살짝 벗어난 호스트의 집으로 향했다. 호스트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로, 깔끔하게 정리되어얼굴의 3분의 1을 덮은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서로 간단히 소개를 나눈 뒤 우리는 짐을 풀고 밀라노를 좀 둘러보고 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이때 아저씨는 우리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던 것 같다. 아저씨가 추천해 준 동네 맛집에서 식사하고, 트램을 타고 이동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AC 밀란 팬들, 요리 축제를 맞이해 열린 요리쇼, 패셔너블한 밀라네제 등을 구경하다 저녁 시간에 맞춰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편한 옷차림의 아저씨는 저녁 준비로 분주했다. 얼마 후 아담한 식탁에 소박하지만 푸짐한 저녁상이 차려졌다. 손님맞이를 위해 잔뜩 꾸민것이 아닌, 평소 먹는 그대로 손에 익은 익숙한 음식인 느낌이 들어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면서 비로소 서로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저씨는 경제 칼럼니스트로, 경제뿐만 아니라 요리, 디자인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본인의 요리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는데, 처음 보는 모양의 파스타를 두 가지 소스에 버무려 위에 곱게 간 파르메산 치즈를 얹은 파스타 요리가 이날의 메인이었다. 적당히 익힌 면은 통통해 식감이 좋았고, 가운데가 파여 있어 소스를 잘 머금고 있었다. 간이 세지 않은 바질 페스토와 토마토소스도 맛있었지만, 간간이 씹히는 신선한 올리브가 별미였다. 곁들인 곡물 빵에 풍미가 깊은 치즈를 올려 야무지게 먹고, 소파로 자리를 옮겨 수다를 이어갔다.
마침 TV에서는 곧 다가올 선거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부끄럽게도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친구에 의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조금 친해졌다는 기분이 들어 사진도 찍었다. 밤이 깊어지자 아저씨는 우리가 잘 방에 침대를 정리해주었는데, 놀랍게도 우리 둘 다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는 2단 침대였다. 카우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깔끔하고 실용적인 가구였다. 그렇게 생전처음 보는 이방인의 환대를 받고 황송한 기분으로 누워 생각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사실, 카우치서핑을 신청할 때부터 아저씨를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동양인 여자애들을 왜 받아줬을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나 자신이 불순한 것일 뿐이었다. 다음날 아저씨의 따뜻한 인사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면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순도 100%의 호의를 보일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