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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May 21. 2022

스쳐가는 향기를 붙잡는 마음_해밍

2W매거진 23호 <무용한 것을 사랑하나요> 이달의 에세이 선정작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3호 <무용한 것을 사랑하나요> 편에 해밍 작가의 '스쳐가는 향기를 붙잡는 마음'이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보이지 않는 향기를 가늠하는 일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보는 마음과 비슷하다.




추위에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도 바깥을 거닐 수 있는 계절이 돌아왔다. 흘러가는 구름, 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꽃들에 시선을 내어주기 바쁘다. 봄을 반기러 나온 사람들만큼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도 거리에 가득하다. 볼 거리로 꽉 찬 풍경을 걷다보면 카페, 노점상, 빵집, 음식점, 상점들이 퍼뜨리는 노래에, 냄새에, 미로인양 이리저리 이끌리기도 한다. 빼곡히 들어선 길을 지나쳐 한적함을 느낄 때쯤 문득 코끝 가까이 무엇인가 잠깐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 타고 온 꽃향기일지, 도심에 섞여든 풀내음일지. 외출 전 뿌리고 나온 향수의 잔향, 혹은 손에 스며든 핸드크림의 흔적일까. 존재감을 내뿜는 음식 냄새와 매연, 담배에 치이고 시간에 희미해진 향기의 기원을 더듬어본다. 마치 덤불을 헤치고 드문드문 난 좁은 길을 이어가듯이.  


향에 마음이 가기 시작한 건 30대에 접어들어서다. 타지에 나와 혼자 살며 빈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면서 이끌렸다. 처음에는 귀국하는 지인들이 쓰던 향수를 물려받는 데서 시작했다. 1년에 티셔츠 한 장 살까 말까, 오늘 커피 한 잔을 사먹을까 말까 하는 전투적 태세로 살다 일상이 무너져 내렸다. 바깥의 온갖 소리들이 침투하는 자취방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몇 시간에 걸쳐 밥을 먹고 밤낮으로 잠만 자는 날이 이어졌다. 머리는 느리게 돌아가는데, 감각은 신경질적으로 첨예해지는 것 같았다. 

물만 마셔도 자괴감이 일던 그때, 우연히 내 손에 들어와 있던 향수 하나를 공중에 뿌렸다. 분사된 입자가 흩어진 자리에 대나무 향이 퍼졌다. 보이지 않는 숲에 들어선 듯하더니 한 시간 만에 신기루처럼 없어졌다. 나는 금세 향수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목덜미에 뿌린 머스크향은 나를 포근하게 감쌌고, 자몽향은 처진 기분을 즉각적으로 끌어올렸다. 어느 날은 꽃다발 한가득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순간이동한 것처럼 파도 소리가 어른거리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각 향수를 구성하는 온갖 향료들의 설명과 시향기를 찾아 읽으며 문자화된 향을 상상해보는 게 이내 나의 기쁨이 되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입고 화장도 안하는 내가 향수를 뿌린다. 아주 가까운 거리가 아닌 이상 알아채기 힘든 데다 공기에 섞여 곧 사라질 뿐이다.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애인도 없기에 누군가 맡을 수도 없다. 어떤 관점에서는 말 그대로 아까운 돈을 공중에 뿌려대는 격이다. 명품 니치향수나 한정판을 소장해서 재테크를 노려볼 것도 아니며, 더구나 향수는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변질된다. 나는 역설적이게도 그 모호하고 덧없는 속성에 끌린 것 같다. 가냘픈 궤적을 남기며 흩어져버리는 향기가 못내 아쉬워 향이 변하는 과정을 따라가기도 하고, 공기 중의 다른 냄새들과 섞여 뭉뚱그려진 것을 걷어내고 맡아보려고도 한다. 

보이지 않는 향기를 가늠하는 일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알아보는 마음과 비슷하다. 크고 뚜렷한 소리 너머, 들릴 듯 말 듯한 데에 귀 기울인다. 선명한 것에 가려 보일락 말락 가물거리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남들 눈에 띄지 않아 쉽게 잊히던 지난날의 내가 겹쳐 보일 때가 있다. 향기는 시간과 기억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며 미묘하게 변하는 향수의 여운을 즐기고, 예전에 다 쓴 향수병을 킁킁대다 파묻혔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시간을 들여 향을 느끼면서, 향이 지나가고 남긴 옅은 자취에 비춰보는 것일지 모른다. 이리저리 휩쓸리며 시간에 떠밀려 온 어렴풋한 내 모습을. 



글_해밍 

인문학을 오랫동안 전공했고, 통번역과 외국어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늘 글 가까이 있으며 가끔 에세이 같은 단편영화도 찍습니다. sanddalgy@hanmail.net





[Mini Interview] 해밍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어!' 글 속에 내 존재를 내보이는 일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오랜 시간 파리에서 학생으로 살아온 해밍입니다. 문학과 영화를 공부하고, 종종 가이드, 통번역, 불어수업을 합니다. 영화관, 미술관, 도서관을 부지런히 다니지만, 여행, 고양이, 향수, 와인과 요리 또한 너무도 좋아하여 학생과 한량의 경계가 상당히 모호한 편입니다.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때부터 늘 글을 쓰고 싶었지만 지금껏 귀찮음 반, 두려움 반으로 감히 시도하지 못했어요. 글이라는 건 예술의 장르라 나처럼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세계 같았고, 뛰어난 문장과 위대한 작품을 보면서 시작도 전에 기가 꺾였죠. 인문학 전공이라 그런지 문학적 엄숙주의가 제게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고 할까요. 

그러다 40대가 되어 2, 30대 때의 나와 달라진 게 없는 걸 직시하고, 동경하면서도 피해왔던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혼자서는 지속적으로 실천이 안 될 것 같아 작년 말 우연히 목요일그녀님이 이끄는 글쓰기 모임을 발견해 한 달 간 함께 글을 썼습니다. 그때 2W매거진을 알게 되었고, 기고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Q. 에세이 쓰기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가 있다면?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 와 다시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거치며 아무런 가시적 성과 없이 오랫동안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 자괴감에 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 되뇌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 존재의 의미를 물어 확인하곤 했어요. 에세이 쓰기에서 첫 번째 기쁨은,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나라는, 이런 사람이 여기 있어' 하고 존재를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나의 의미가 찾아지고, 타인의 인정과 별개로 스스로 설 수 있음을 매번 글을 쓰며 느낍니다.  

두 번째는 글 쓰는 과정에서 어떤 심상을 떠올려 볼 때, 그리고 특별한 어휘와 문장이 문득 찾아올 때의 반짝이는 순간입니다. 제 마음 깊은 데서 길어 올린 이미지와,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한 말들이 주는 기쁨이에요. 

마지막으로, 저의 에세이를 누군가 읽어줄 때 오는 강렬한 기쁨입니다. 읽는 동안 지켜보는 설렘과 이해 받는 느낌, 읽은 후 들려주는 감상에 힘입어 새로이 나의 이야기를 해나갈 용기가 납니다. 이 과정이 이어지면서 저에게 에세이 쓰기가 살아있는 기쁨, 살아가는 기쁨을 줍니다.  


Q. 반면에 힘든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오래 홀로 침체되어 그런지 전반적으로 제 글이 모호하고 좀 무겁고 어두운 것 같은데요. 저의 아픔, 우울, 번민과 상념, 분노, 죄책감, 나약함과 무력함이 넘실대는 이야기도 결국 제가 이것들을 안고 살아왔기에 쓰게 되거든요. 

그때마다 저의 경험과 느낌이 표현하기에 정당한 것인지, 그 표현이 진실된 것인지, 읽는 이에게 불쾌만 주는 것은 아닌지, 자기연민이나 자기위안만이 목적은 아닌지 예전의 경험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따지는 과정이 힘들고 그런 경험을 한 자신이 서글퍼집니다. 예로, 4월호에 실린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에 대해 쓸 때 (<너의 의미>) 매일 슬픔에 잠겨 지냈어요. 시름시름 죽어가는 코코 꿈을 매일 꾸며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슬프고 자책도 하는 제 모습이 서러웠습니다. 그러나 쓰고 난 뒤에는 대개 카타르시스, 말 그대로 정화가 찾아오고, 무언가 스스로 한 단계 넘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말로 잘 표현되지 않는 미묘한 감정과 감각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사물과 풍경들, 숨은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계속 쓰고 싶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동식물과 사물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곧 없어질 것 같아서 안타까웠어요. 글은 남잖아요. 제가 포착한 것을 글로 옮겨,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잔영을 남기고 싶습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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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을 스치고 지나간 향들이 나에게도 다가왔다가 슬며시 흩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과거에 지나쳐온 여러 가지 향이 떠올랐고, 그 향이 났을 때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의 미소도 떠오르는가 싶더니 지나간 시간처럼 금방 사라져 버렸다.


*

향기가 어떤 추억을  소환하고, 누군가를 불러내는 마음을 가져오는 경험을 저도 했던 적이 있어요. 유행이 오래전에 지나버린, 아마도 지금은 공중목욕탕의 싸구려 스킨 냄새와도 비슷할... 아주 오래전 아빠의 초록색 스킨 냄새를 기억해요. 아주 어쩌다 지나치는 나이 지극한 아저씨들에게서 비슷한 향기를 언뜻 맡으면 저도 그 향이 지나가고 남긴 옅은 자취를 따라 아빠를 생각하곤 합니다. 문득, 나는 어떤 향기로 기억되려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

해밍 작가님은, 물만 마셔도 자괴감이 일던 시기에 우연히 향수를 만났다고 했다. 공중에 뿌려 분사된 입자가 흩어진 자리에 대나무 향이 퍼졌다고. 그렇게 향수의 세계에 매료되었다고. 화장도 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맡을 것도 아니지만, 재테크를 노릴 것도 아니지만 '모호하고 덧없는 속성에 끌려' 향기를 찾아다니는 작가의 즐거움을 글을 읽으며 계속 쫓아다녔다. 향을 쫓으며 자신이 남긴, 떠밀려 다닌 자신을 찾아본다는 작가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어쩐지 작가가 풍기는 은은한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내게 향수란 너무 과해서 괴롭거나, 너무 약해서 알아채지도 못하거나 둘 중 한 가지였던 것 같다. 한번도 향수의 매력을 느껴본 적 없는 내게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글이었다. 마치 글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사실 향수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기보다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아채는 그 감각이 더 부럽게 느껴졌다. 그런 감각을 지닌 사람에게선 분명 좋은 향기가 나겠지.




*이 글은 2W매거진  23호 <무용한 것을 사랑하나요> 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



[전자책] 무용한 것을 사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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