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W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아미 Jun 20. 2022

나는 낙원을 꿈꾸지 않는다_해일

2W매거진 24호 <여자들이 사는 동네> 이달의 에세이 선정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4호 <여자들이 사는 동네>  편에 해일 작가의 '나는 낙원을 꿈꾸지 않는다'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아하는 도시가 있으세요?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 가고 싶은 곳을 묻는 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을까. 누군가 어디에 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과거의 나는 꼭 어딘가를 특정해서 말했다. 예를 들면 제주도, 예를 들면 바닷가, 예를 들면 어떤 카페. 출근 준비를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댓글을 썼다. 더 이상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을 보니, 지금 제가 사는 곳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딘가를 가고 싶다는 말은, 지금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다. 과거의 나는 늘 살던 곳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자라왔다. 어딘가에 정착했다는 말은 내게 어딘가에 매여 있다는 말이었다. 매여 있는 공간은 지옥이었고, 반복되는 시간 역시 지옥이었다. 딛고 있는 발이 아닌 다른 곳을 보았다. 다른 곳에 가고 싶었다. 나를 상처 입히고 지겹게 만드는 현재의 시간과 이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를 통과한 시간과도 이별하고, 나를 남겨왔던 공간과도 이별했다. 존재했던 곳을 떠나왔고, 살았던 과거를 지나치며 나는 지금 이곳에 왔다. 나는 이제서야 저 멀리 있는 지평선이 아닌 내 발끝을 본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 여기 이곳. 더이상 어딘가로 옮겨가는 삶을 꿈꾸지 않는 나는, 드디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시간과 공간이 같은 개념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다. 공간은 비어있기 마련이고, 결국 다시 환원되는 것은 그 공간을 채우는 시간과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되니까.


나는 이곳에서 아주 만족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가끔 친구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황하곤 한다. 이미 일상으로 들어온 삶이기에 특별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늘 특별함을 찾아 헤매던 삶이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기쁨과 고통과 슬픔과 분노가 존재하는 곳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버티고, 견뎌내고, 참아내며, 열심히 나의 공간과 일상을 돌보는 내가 있다. 아침 출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아저씨의 수신호를 본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아저씨는 나에게 꼭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나도 짧게 목례한 뒤 엑셀을 살짝 밟는다. 미처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아이가 뛰어올 수 있으니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아침마다 주고받는 이 짧은 교감이 하루를 감각하도록 만든다. 퇴근할 때는 소양강을 거치는 다리를 건너고, 창밖에 흘러가는 구름과 강물을 본다. 아무리 고단한 하루였어도 풍경을 보면 마음이 정화된다. 


집에 돌아와 운동복을 갈아입고 러닝을 한다. 차를 타고 지나다닐 때는 몰랐던 풍경과 사람과 공간을 비슷한 위치에서 천천히 바라본다.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내가 서 있는 곳을 다시 깨닫는다. 내가 꿈꾸던 낙원이 어디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온전히 이해한다. 괴롭고 무기력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깊게 상처받아야 하는 낙원. 나는 더 이상 낙원을 꿈꾸지 않는다.


글_해일

사라지고 싶을 때마다 글을 썼다. 결국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글이었다. 누구도 대신 기록할 수 없는 나의 역사를 쓰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요약되고, 탈락되고, 생략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충실히 나의 오늘을 기록합니다.





[Mini Interview] 해일


"쓸 수 없는 것들의 경계를 넘어서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해일입니다. 작가이지만, 작가는 아닌 사람입니다. 본업은 평범한 직장인이고요, 글 쓰는 걸 좋아해요. 예전에는 글 쓰는 일을 전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글 쓰는 일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길 바래서, 본업은 따로 있는 지금이 좋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쓰고 있어요.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블로그를 서칭 하다가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글 쓰는 여성들이 많으니까, 그 글을 모아서 매거진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찾아보니까 정말 그런 일을 사람들이 있었고, 그게 2W매거진이었죠. 참여하는 필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게 글 쓰는 여성들의 느슨한 연대 같다는 생각을 해요. 글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속가능성인데, 이 연대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복잡한 교착이 여기에서 이뤄지기도 하거든요. 우연히 2W매거진을 알게 된 건 정말 행운이었어요.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글의 주인공을 ‘나’로 불러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무거움이 있어요.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 사건의 디테일이나 인물의 대사들은 조금씩 각색이 가능하지만, 그 사건이 내 인생에서 가지고 있는 경험의 속성을 바꿀 수는 없거든요. 처음에는 그 지점을 많이 고민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을까. 글 쓰는 일은 사실 검열이기도 하거든요. 더군다나 그것이 나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죠. 그 메시지가 바깥에 나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검열을 이겨내야만 하거든요. 그게 여성들이 마주하는 글쓰기의 본질적인 두려움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게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죠. 고민이 깊어질수록 나에게 금지된 것이 사실은 여성에게 오랫동안 금지되어 왔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여성들의 섹스나 남성편력, 권력에 대한 도전, 결혼과 출산에 대한 반론, 몸에 대한 자기 통제권, 웃지 않는 여자 같은 것들이요. 오랫동안 검열되어 왔던 것들을 쓸 때는 대부분 고통스러워요. 가본 적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더 그렇죠.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작업을 할수록 자유롭다는 거예요. 글쓰기가 고통이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면서 결국 답을 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아주 완벽한 대답은 아니지만, 글을 쓰면 어딘가에 도달하게 돼요. 좋은 과정을 통해 도달했다면 자유를 느낄 수 있죠.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오랜 시간 혼자서 천착하는 글쓰기를 하며 알게 된 건, 금지된 것은 없다는 거예요. 쓸 수 없는 것들의 경계를 넘어서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리거든요. 대부분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다른 것들이 시작되었어요. ‘쓸 수 없는 것’들을 지나서 제가 만나게 된 질문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이었죠.

시작한 곳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어요. 그런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돌고 돌아서 다시 시작한 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죠. 그래도 상관없어요. 제자리에서 계속 있었던 사람과 그 모든 것을 겪고 다시 돌아온 사람의 글은 같지만 완전히 다르죠. 여성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기회와 도전과 실패가 허락되었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고백하는 글쓰기는 결국 자신이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고백이기도 해서, 그 시간의 색깔이 더 다채롭고 풍부할수록 좋은 글이 쓰이거든요. 시간이 여성들의 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더 다양하고 자유롭고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면 좋겠어요. 저에게 남은 과제는 ‘어떤 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계속 글을 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일 것 같아요. 저도 그 어딘가에 남아 있으려면 계속 글을 써야 하겠죠. 

그냥 계속,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

정착을 원하지 않다가 이내 작가님이 발을 딛고 있는 그곳에, 그 현재에 작가님 자신을 내려놓는 그 순간의 표현이 너무 와닿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매여 있거나, 반복되는' 것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껴왔던 지라 그 '현재'에 적응해내고 일상에 조금씩 뿌리내리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

살고 있는 곳에서 하루라도 더 있으면 질식사할 것 같아서 전혀 모르는 곳으로 봉사활동 갔다가 결국 현실을 헤쳐나가야 하는 주무대는 살고 있는 곳이란 걸 절절히 깨달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낙원을 소망하는 건 너무 나이브한 걸까요. 


*

저는 예전에 혼자 여행을 잘 다녔어요. 해일님의 이 문장을 읽으며 아! 내가 혼자 여행을 떠나던 순간들 모두 벗어나고 싶을 때였구나.라는 걸 알았어요. 해일님의 이 문장을 읽으며 혼자 여행을 떠났던 과거의 제가 떠올라 조금 울컥했어요.


*

한 곳에 정체된 느낌은 그곳을 지옥으로 만든다. 정착을 원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이 지긋지긋해지면 금방 떠나고 싶다. 더군다나 좋은 추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은 곳이라면. 해일 작가의 글을 읽으며 과거의 고향 생각이 났다. 십 년 전 한번 가보고 다시는 가지 않았던 곳. 그곳은 내 기억만큼 을씨년스러웠다. 고등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나며 나는 마음이 홀가분했다. 당장 엄마 없는 생활을 시작해야 했지만 그곳을 떠날 수 있어서 마냥 좋기만 했다. 그래서 지금 정착한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지금 사는 이곳을 좋아한다. ‘낙원을 꿈꾸지 않’지만 내가 있는 곳이 편안한 곳이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이 글은 2W매거진  24호 <여자들이 사는 동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