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W매거진 25호 <여자, 여행을 떠나다> 이달의 에세이 선정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5호 <여자, 여행을 떠나다> 편에 안 작가의 '여기가 어디인가요?'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지를
여행하고 있는 우린
모두 길치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난 길치들에게
기억에 남을 별일이 다 벌어지길!
누군가 인생은 여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길치여도 괜찮은 걸까. 처음 가보는 곳에서 지도 한 장 들고 있지 않은 채 길을 잃은 길치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이십 대 초반, 이제 막 인생이라는 여행을 떠난 나는 혼란 그 자체였다.
나는 길치였다. 학년이 올라가서 새 학교로 진학하면 남들은 잘만 찾아가는 학교를 이상하게 멀리 돌아가서 간신히 지각을 면하고는 했다. 대학생이 되어도 길치인 건 변함이 없어서 자취를 시작한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친구가 카톡으로 지도를 보내주면서 집은 교회 옆에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주위에 교회 옆에 있는 집은 너무 많았다. 지도 앱을 보면서 친구 집을 찾았지만, 골목은 좁고 건물은 다닥다닥 붙어있고 여러 갈래로 뻗어있는 길들 때문인지 앱 속 나침판도 정신을 못 차렸다. 나를 점점 친구 집에서 먼 곳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친구가 올 때까지 거리에서 기다리기엔 12월의 저녁 바람은 매서웠다. 어떻게든 빨리 길을 찾아야 했다.
당시 스물세 살의 나는 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예술전공이라서 그랬는지 자유로운 동기들은 거의 휴학을 했던지라 우리 학번에서는 나와 동기 한 명만 졸업예정자였다. 휴학한 동기들처럼 나도 한 학기 정도는 휴학을 하고 싶었지만, 휴학을 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몰라서 학교만 다니다 보니 졸업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과에서는 졸업이 빠른 편이었지만 다른 전공인 친구들과 비교하면 빠른 편도 아니었다. 주위에는 취직을 했다거나 자신만의 길을 알아서 찾아가는 친구들이 넘쳐났고 그런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초조해졌다. 나는 대학원에 가서 문학을 더 공부할지, 일본에 가서 극작을 공부할지, 취직을 할지 고민 중이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지 후회하지 않을지 고민했지만 내가 한 선택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막막했다. 인생이라는 여행지에서 수십 개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지도에 없는 길들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같은 길을 세 번 정도 왔다 갔다 했을까 가방을 메고 있는 어깨는 무너질 것 같았고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은 얼어서 액정을 만지기가 어려웠다. 아르바이트 중인 친구는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집에 도로 가버릴까 했지만 해가 져서 지하철역까지 갈 길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날씨 때문인지 길에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저기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가로수처럼 가만히 서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끌어안을 뻔했다. 이분한테 길을 물어보면 되겠구나, 하고 휴대폰으로 친구의 집 주소를 보여주려는데 아주머니의 말에 온몸이 굳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네?”
“제가 여길 처음 와봐서요. 길을 잃었거든요.”
아주머니가 멋쩍게 웃으며 목에 두른 목도리를 매만졌다. 하늘을 향해 ‘나한테 왜 이래, 정말!’ 하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았다. 이 상황에서 두 명의 길치라니. 가로등 밑에 서 있었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저도 여기 처음 와봐서 길을 몰라요. 저도 친구 집 찾다가 길을 잃은 거라서요.”
“그럼 같이 찾아볼까요?”
아주머니가 실망하고 떠날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주머니는 내게 제안했다. 길을 찾기에는 쓸모없는 길치가 두 명으로 늘어난 건데 같이 찾아보자는 말에 이상하게 힘이 났다. 아주머니가 나처럼 이 부근을 헤매면서 본 건물들과 내가 헤매면서 본 건물들, 지도 앱에 나온 건물들을 조합해서 겨우 길을 찾았다. 이사한 딸의 집에 가다가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는 아주머니를 딸의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다 보니 그 근처가 친구의 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 앞이 막막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면 그때 만났던 아주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여긴 어디예요? 여기가 어디인가요?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인가요? 나는 어디에 있는 건가요?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던 말은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아주머니와의 만남이 잠깐이었던 만큼 나눈 대화도 적었지만, 기억 한편에 남아서 어느 순간에 갑자기 떠오른다. 우리는 길을 잃었을 때 주위를 가장 많이 둘러보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한다. 내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혼자 힘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면 물어보면 된다. 혹여나 그 사람도 길을 모른다면 다른 사람을 찾거나, 그 사람이 가본 길까지는 가본다면 더는 길을 잃은 게 아닌, 길을 찾아가는 게 된다.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여행이 조금은 즐거워질지도 모른다.
나는 졸업 전 교수님께 상담을 부탁드렸다. 내가 고민하는 것들,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들에 대해 말씀드렸고 교수님이 해주신 조언과 내 생각을 정리해서 길을 선택했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일본에서 생활하며 대학교에서 극작 수업을 들었고 귀국 후에는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대학원 입시 준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수십 번 다시 길을 잃었고 헤맸고 방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끊임없이 만남은 있었다. 내가 가려는 길과는 다른 길에 있지만 비슷한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헤맴 속에서의 만남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대학원에 다니는 지금도 길 위에서 장애물을 만난다거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 들어선 길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번 길은 괜찮은데 하고 안심하는 순간 싱크홀을 마주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 20대 초반 나와 20대 후반 나의 차이는 길을 잃었거나 앞으로 갈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길을 떠난 사람, 나와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고 늘 그랬듯이 헤매면서 떠나면 된다.
인생을 두 번 살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인생이라는 여행지를 여행하고 있는 우린 모두 길치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난 길치들에게 기억에 남을 별일이 다 벌어지길!
우린 분명히 끝내주게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명심하길.
글_안
무슨 생각 하냐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늘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왔다 갔다 해서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생각을 덜 하는 연습 중이지만 잘 안된다.
[Mini Interview] 안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고등학생 때부터 소설을, 대학생 때부터 희곡을 공부한 대학원생이자 한 극단의 극작부에 소속되어 글을 쓰고 있는 안이라고 합니다. 소설과 희곡은 본명으로, 에세이는 필명으로 발표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제 본명으로 발표한 소설과 희곡도 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집중력도 부족하고 쉽게 싫증 내고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많은데 글은 여태 쓰고 있어요.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생 때 만난 언니가 2W매거진에 에세이를 연재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2w매거진을 알게 됐지만 당시 저는 대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매일을 버티면서 보내고 있어서 투고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못하고 지내다가 어느새 잊었어요. 그러다가 몸과 정신에 한계가 와서 대학원을 휴학하고 쉬고 있었는데 버릇처럼 글을 쓰고있더라고요. 여태 써온 글과는 다른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검색을 해보던 중 한 블로그에서 2W매거진 원고 모집 게시물을 보게 됐어요.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게 2W매거진은 여성 작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투고하게 되었어요. 감사하게도 인터뷰로나마 인사도 드리게 되었네요!
Q. 작가님에게 에세이 쓰기란 어떤 의미인가요?
22호 원고 마지막에 '소설을 쓸 때면 어려운 교수님과, 희곡을 쓸 때면 어색한 선배와, 에세이를 쓸 때면 잠옷과 슬리퍼 차림으로 십년 지기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든다'고 쓴 적이 있어요. 아무래도 배워온 게 있는지라 소설과 희곡은 쓰기 전부터 힘이 들어가고 대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제가 쓰는 소설과 희곡은 굉장히 어둡거든요. 한 교수님이 '너무 다 죽지 않나요?'라고 하셨을 정도로... 이것도 제 작품 스타일이고 작품 내 '필요한 죽음'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내용을 쓰는 게 힘들긴 하더라고요. 힘들 때면 에세이를 썼는데 재밌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에세이를 쓸 때면 동네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 떠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자유롭기도 하고 먹구름으로 가득 차있던 머릿속이 햇빛으로 환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제가 가벼워지니까 읽는 사람도 부담을 느끼지 않더라고요. 리뷰를 읽을 때면 저와 비슷한 생각이나 다르지만 재밌는 생각을 접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그리고 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서 재밌어요. 누군가 '저 사람 어때?'라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지만 '너는 어떤 사람이야?'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잖아요. 에세이는 저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데 도움을 줘요. 에세이 덕분에 저와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길어졌어요.
Q. 에세이 쓰기가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글이 그렇듯이 좋은 에세이를 쓰는 게 쉽지 않아요. 잘 쓴 글과 좋은 글은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럴 듯해보이고 있어보이는 글보다 자신과 소통이 잘 된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쓴 글이라고 해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된다거나 자신의 의도와 다른 글이 나오기도 하니까요. 쓴 사람부터 그런 생각이 들면 읽는 사람에게 닿기 힘들거예요. 에세이를 쓸 때는 최대한 힘을 빼고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고 해요. 머릿속에 있는 내용이 글로 표현되지 않을 때 힘들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힘듦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써내려가요.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아무도 상처 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 이 문장은 23호 원고 마지막에 쓰여있어요. 허구이건 사실이건 나만 나오건 많은 사람이 나오건 간에 제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선 잘 알아야겠죠. 가벼운 내용의 글이라고 하더라도 쓰는 사람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글을 쓰지 말아야 하니까요. 글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글 쓰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고요. 그저 묵묵히 제 글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관심이 닿는 무엇이든 쓰고 싶어요.
필진들의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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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여행지에 비유하니, 삶이 조금 더 다채롭고 흥미롭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길치'라는 표현도 재미있었고, 실수를 해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를 받았다. 당장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여행을 다니다 보면 숙소로 돌아가는 차가 끊겨버리기도 하고, 허리케인으로 비행기가 결항되기도 하니까. 그래도 끝내주게 멋진 여행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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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에피소드가 있고, 엄청난 이야기가 있지 않은데도 잔잔하게 읽혀지는 글이었다. 사람눈만큼이나 길눈도 어두운 사람이 나인지라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가끔 익숙한 길에서도 길을 잃은 것같은 기분이 드는 나날도 있어서 더더욱 다가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길을 잃었을때 함께 길을 찾을 아주머니가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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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작가는 지독한 길치라서 친구 집을 찾다가 길을 헤매던 경험을 떠올린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어 고생할 때 같은 길치인 아주머니를 만나 함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생도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찾기도 하며 떠나는 여행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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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나의 인생 자체도 여행이지.' 그 길목에서 정신없이 헤매고 있는 나에게 '여행을 떠난 길치'라는 말이 콕! 와서 박혔다. 원래도 길치여서 눈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지도가 알려주는 곳이 어딘지를 몰라 헤매는 나다. 지금도 헤매는 중이구먼. 읽으면서 왠지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글은 2W매거진 25호 <여자, 여행을 떠나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