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W매거진 26호 <나의 싸움 일지> 이달의 에세이 선정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6호 <나의 싸움 일지> 편에 김은희 작가의 '우리는 스스로를, 서로를 구원한다'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나의 싸움은 적이 분명하지 않아 더 힘들다.
나의 시간과 싸워야 되는가.
여자의 의무와 싸워야 되는가.
몽화록은 유역비가 출연한 중국 드라마이다. 유역비는 극중에서 찻집 주인 조반아를 맡아 열연하였다. 조반아는 사업을 확장하여 찻집이 아닌 주루를 열려고 한다. 동경은 대도시라서 찻집 손님보다 주점 손님이 월등하게 많기 때문이다. 조반아가 주루를 계약하려고 할 때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의 관인을 가지고 오시오.”
“미혼인데요.”
“그러면 아버지나 오라비와 오시오. 설마 조 낭자가 직접 망월루를 운영하는 것이오?”
“그럼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되지요.”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경에서 여인은 주루의 점주가 될 수 없다, 낭자들이 누룩을 만지면 술이 시큼해질 것이다, 점주가 되어 운영하는 건 남자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조반아는 말도 안 되는 규칙이라고 일축한다. 당당하게 계약금을 마련해서 계약한다.
주인의 논리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여성들을 링 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그들만의 규칙이었을 뿐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장면은 수두룩하다.
내가 교직 사회에서 들은 낡아빠진 고정관념들이 있다. 여자 교장이라서 더 깐깐하다, 여교사라서 잔소리를 많이 한다, 여교사가 많아 아이들을 못 잡는다.
남성 관리자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듯 여성 관리자도 비슷하다. 여교사라서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한 안내인 경우가 많다. 여교사가 많아 아이들을 못 잡는다는 논리 자체는 문제가 있다. 학생들은 잡아야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하는 교육 주체이다. 나는 여성 체육교사가 남중생들을 축구 실력으로 압도하는 것도 보았고 여성 학생부장이 규칙을 어긴 학생들을 부드럽고 단호하게 지도하는 것도 보았다. 그런 고정관념이나 속설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조반아가 멋지게 느껴진 것은 그런 속설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의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조반아의 싸움은 어떤 것인가. 여자가 주점 사장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당대 송나라 사회와의 싸움이자 원수의 딸과 결혼할 수 없다는 남자 주인공의 아집을 꺾는 싸움이자 남자에게 기대지 않고 오롯이 혼자 서는 여자의 싸움이다. 조반아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여성 동료들과 연대하여 훌륭하게 극복한다.
나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나의 싸움은 적이 분명하지 않아 더 힘들다. 나의 시간과 싸워야 되는가. 여자의 의무와 싸워야 되는가. 여자라면 다들 그렇게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남자를 위해 희생하면서 사는 거라는 프레임과 싸워야 되는가.
먼저 나는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의 먹고 자고 입고 씻고 노는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누군가의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고 남편의 옷을 세탁하고 남편의 감정을 존중해야 한다. 며느리이기 때문에 기념일을 챙기고 안부 인사를 해야 하며 같이 여행을 해야 한다. 누군가의 딸이므로 부모님의 건강을 챙겨야 하며 옷을 챙겨야 하며 식사를 챙겨야 한다.
물론 이 일들은 내가 즐겁게 자원하여 수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종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가정 내 역할과 일하는 여성이라는 자아가 충돌했을 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 절실히 느끼게 된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현실은 현실이지만 때로 맞닿는 지점이 있다. 몽화록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조반아의 얼굴은 빛이 난다. 그런 조반아의 옆에는 든든히 연대하는 또 다른 주체적 여성들이 존재한다. 요리하는 삼랑, 비파를 연주하는 인장이 그러하다. 세 여자의 우정과 연대를 보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내가 육아로 힘들어 할 때 나의 고민을 같이 들어준 육아동지이자 직장에서 존경받는 워킹맘 S를 떠올려본다. 과중한 업무로 힘겨워할 때 슬며시 공진단을 내밀고 간 터줏대감 워킹맘 L을 떠올려본다. 내가 수많은 기대에 짓눌려 얼굴이 파리해져 갈 때 조용히 응원 메시지를 보내준 고민해결사 B를 생각해 본다.
제자리에서 싸우는 멋진 여성 동료들의 이름을 끝없이 나열할 수 있다. 주체적인 여성 옆에는 또 다른 주체적인 여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서로를 구원한다.
글_ 김은희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지향합니다
[Mini Interview] 김은희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름은 김은희이고, 38살 워킹맘입니다. 온라인 서점 플래티넘 회원이고 새로운 동네 책방을 탐방하는 것도 즐겨합니다. 제 인생에서 책을 빼면 할 이야깃거리가 7할쯤 사라질 것 같네요. 좋아하는 작가를 대라면 줄줄이 말할 수 있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끊으면 책을 더 많이 읽을 것 같은데 길티 플레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ENFP답게 사람 만나는 데서 힘을 얻는 스타일이며 친구들 사이에서는 바쁜 척 대마왕으로 불립니다.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목요일 그녀님과 블로그 이웃으로 지내면서 온라인 글쓰기 모임도 참여하게 되고 2W매거진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제 글을 공개하고 지지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매일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W매거진을 읽으면서 글쓰기 동력을 얻습니다.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에세이를 쓸 때 기쁜 순간은 가족에 대한 글을 쓰다가 저도 몰랐던 감정을 깨달았을 때 기쁩니다. 또 직장에서 얻은 성취를 글로 풀어낼 때 제가 조금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기쁩니다. 글을 쓰면서 괴로울 때는 제가 제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기후위기에 관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50리터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나갈 때 느끼는 괴리감이 가장 참담합니다. 또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글을 쓰고 나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져서 보다 단단한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는 순간이 자주 있습니다.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제 삶을 꾸며서 드러내지 않는 정직한 글을 쓰고 싶고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 하는 느낌을 주는 따뜻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깨달음을 주는 통찰력 있는 글을 쓰고 싶은 원대한 소망도 마음 한 켠에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제가 좋은 하루를 보내야 하고 제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다. 결국 알게 될 일들이었고 이미 알아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혼자인 것 같지만 똑같이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여성들이 주위에 많다.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도 내 앞에서 누군가가 싸워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한 것처럼 나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면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나도 멋진 여성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여자 둘이 나와서 잘생긴 남자 하나 두고 싸우는 역할만 맡고 있다면 바로 덮어버린다. 굳이 재미없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볼 이유가 없다. 드라마 속 조반아 같은 주체적인 여성뿐 아니라, 현실에도 김은희 작가님과 곁에 있는 여성 동료들처럼 멋진 분들이 있어 기쁘다.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콘텐츠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글을 쓰는 여성들의 '싸움'이야기를 들으며(읽으며) 우리의 싸움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기고 지고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묵인하지 않고 마주하는 일.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일.
무엇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서로를 구원하게(김은희 작가 문장 발췌)'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이 글은 2W매거진 26호 <나의 싸움 일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