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W매거진 27호 <덕질의 추억> 이달의 에세이
글 쓰는 여자들의 독립 웹진 <2W매거진>은 매달 다른 주제의 에세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수록된 에세이 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작품을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하여 '책꾸러미 럭키박스'선물을 보내드립니다. 27호 <덕질의 추억> 편에 우리셋 작가의 '나의 덕메에게'가 선정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지닌 힘이 있는 거 같아.
직업이,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덕질이 세상 무용해 보인대도
그것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잖아.
언니. 우리가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게 새삼스럽긴 하다. 맨날 애 키우는 얘기, 애한테 화낸 얘기, 상담받아볼 얘기만 하다가 말이야. 누구 한 명 파면서 유튜브 영상을 공유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내가 추천한 콘텐츠들에 언니가 만족해 주니 뿌듯해. 그래도 나 20년 넘게 꾸준히 장기, 단기, 헤비, 라이트로 덕질을 하고 있잖아. Y의 눈빛에 빠져서 그가 나온 드라마를 뒤늦게 정주행하기도 했고, L의 음색에 빠져서 주야장천 듣다 보니 복면가왕에서 두 소절 만에 L을 알아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지. S의 콘서트에 가서는 스크린도 봐야 하고, 무대도 봐야 하고, 응원봉으로 빛나는 팬석도 봐야 하고, 멤버들도 두루두루 다 봐야 하는데 왜 인간의 눈은 두 개밖에 없는가를 한탄했고 말이야.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별안간 새로 시작된 아이돌 덕질이라니. 말해 뭐해. 너무 황홀한 요즘이야.
덕질하기는 또 얼마나 좋은 세상인지. 알고리즘 무섭다고 이거 어쩔 거냐고 할 땐 언제고, 안 본 영상 없게 이끌어주는 천재 알고리즘에 매일 감탄한다니까? ‘라떼’는 학원 가기 전에 인기가요 녹화해달라고 엄마한테 등짝 맞으면서 부탁하고 그랬잖아. 혹시라도 녹화 테이프가 가족 누구 실수로 다른 방송으로 덮어 씌워지기라도 하면 나라 잃은 사람처럼 우는 게 ‘국룰’이었는데. 이젠 뭐, 다시보기로도 모자라서 항공캠, 멤버별 직캠, 세로캠, 페이스캠, 단독샷캠……. 이름도 낯선 캠들을 마르고 닳도록 보고 또 볼 수 있다니 그야말로 꿀덕질 아닐 리 없어. 킬링 포인트는 나노 단위로 돌려보고, 좋은 건 같이 봐야 하니 바로바로 공유하고. 다른 팬덤 친구랑 잡지 찢어 교환하면서 내 연예인 사진 스크랩하던 시절이 새삼 아득하지 않아? 진작에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긴 그랬다면 우리 시험 성적은 엉망이었을지도. C가 인스타 라이브 방송할 때 보면, ‘시험 기간인데 라방만 다 보고 공부해야지ㅠㅠ’ 하는 댓글 진짜 많더라. 아무렴. 단비 같은 최애의 라방을 뒤로하고 시험공부를 하러 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런 얘기 어디 가서 속 시원하게 하겠어. 해봤자 뭐, 요즘 핫하더라, 멋있더라 정도지. 사람들 전부, 취향 존중한다 어쩐다 해도 연예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거 은근히 얕본다? ‘아이돌 덕질’일 경우는 더 그래. 시선이 곱지 않아. 묘하게 하위문화 취급을 한달까. 나이까지 많이 먹고 덕질을 한다면? 그 연예인한테 돈까지 쓴다면? 한심의 눈초리가 더 세지지. 어렸을 땐 어린 것들이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하더니, 어른 되니 나이 먹고 왜 저러냐 더라. K 언니 알지? 그 언니 아직 결혼 안 하고 회사 다니면서 짬짬이 N 공연 보러 다니고 굿즈 모으고 하거든. 코로나 전엔 혼자 일본 공연도 자주 다녀오고. 근데 주변 사람들이 그 언니한테 뭐라는 줄 알아? 결혼도 안 하고 쟤는 대체 뭐 하고 있냐는 거야. 뭐 하긴요, 덕질 하면서 제 앞가림 하며 잘 살고 있죠. 우리 같은 경우는 이제, 애 엄마씩이나 돼서 왜 저렇게 주책이냐 소리 듣는 거고. 그런 거 보면, 케이팝 위상이고 트로트 열풍이고 뭐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대도 연예인 덕질 이미지는 여전하구나 싶어. 책이나 운동, 괜찮은 취미 덕질은 칭송까지 받지만, 사실상 연예인 덕질은 쓸모없는 짓에 가깝다고 여겨지니까. 솔직히 우리 스스로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하잖아. 왠지 민망해하고, 눈치 보고, 이래도 되나 하면서. 그러니 덕심 없는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어.
덕메가 필요한 이유는 이걸 지도 몰라. 내 마음을 알아준다는 거. 무시하지 않는다는 거. 공연에 못 간 나를 위해 현장 판매만 하는 응원봉을 내 것까지 사다 주는 언니의 마음이, 티케팅에 실패하면 같이 걱정하고 고민해 주는 마음이, 새로 볼 영상이 뜨면 후다닥 빠르게 소식 공유하면서 ‘봤어? 봤어?’ 하며 즐기는 마음이 막 고맙고 든든하잖아. 얼마 전엔 혼자 좋자고 쓰는 최애앓이 포스팅에 지나가는 누군가 댓글을 달았더라고. 혼자 덕질 하느라 쓸쓸했는데, 같은 늦덕의 마음을 구구절절 잘 표현해 줘서 반갑고 고맙다고. 우리 애들도 놀이터에서 땅 하나를 파도 누구랑 같이 파야 재밌어하잖아. 덕질도 그런 거 같아. 내 얘기에 고개 끄덕여줄 사람, 내 감정을 하찮게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우리 어머님이 트로트 가수 K에 빠져서 나한테 신나게 이야기할 때, 난 K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지만 가짜 덕메 노릇을 해줬어.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으니까. 그 정도 맞장구는 어렵지 않았어.
좋아하는 마음이 지닌 힘이 있는 거 같아. 직업이,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덕질이 세상 무용해 보인대도 그것만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잖아. 꽃이 대단히 유용하거나 생산적이진 않지만 그저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환기될 때가 있는 것처럼. 전에 J가 팬들한테 큰절 하는 사진 올라온 걸 봤는데 멘트가 한 줄 적혀있더라고. “여러분 저희를 위해서라도 꼭 행복하세요!”
아니, 우리가 J 팬이었다면 어땠겠어. 정말로 반드시 행복해지고 싶었을 걸? 적어도 저 하루만큼은 진짜로 그랬을 거야. 부모님도 선생님도 움직이지 못한 마음이 어느 하루에 스르르 움직이는 거, 그게 좋아하는 마음의 힘 아니면 뭐겠어?
언니. 가끔 덕생에서 그만 나와야겠다고 억지로 애쓰던데, 이게 참는다고 참아도 결국 볼 만큼 보고, 팔 만큼 파야 갈증이 해소되는 거 같아. 매사가 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아. 아, 근데 우리 맨날 심리상담센터 얘기하던 거 말이야. 같이 덕질 하면서 한동안 그 얘기 안 했던 거 알아? 우리 어쩌면 셀프로 구겨진 마음 매끈하게 펴는 팁을 얻은 건지도 몰라. 물론 그럼에도 매일매일 여전히 화는 나지. 이 동력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어떻게 푹 빠진 건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 시들해질지도 알 수 없지. 그래서 더욱 바라. 다른 어떤 대상으로 갈아타도 좋으니 언니만의 ‘덕질’을 멈추지 않기를.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언니, 나의 덕메가 되어줘서 고마워!
**용어설명
1. 덕메: 덕질을 같이 하는 친구. 여기서 ‘메’는 ‘mate’를 뜻한다.
2. 최애: 가장(最) 사랑(愛)하는 대상.
3. 늦덕: 어떤 대상에 ‘뒤늦게’ 빠진 덕후.
글_우리셋
세 아들을 키운다. 매일이 소란과 혼란의 연속이지만 그 와중에 좋아하는 것도 마음껏 좋아해야 해서 바쁘다.
[Mini Interview] 우리셋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우리셋’입니다. 첫째를 낳고 단란한 세 식구일 때 블로그를 시작해서 닉네임을 이렇게 지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아들 셋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 우리셋이 이 우리셋이 될 줄은… 방송작가로 짧게 일했었고, 지금의 글쓰기는 특기도 아니고 딱 취미 정도입니다. 가끔 사춘기보다 무서운 사십춘기가 찾아와서 ‘뭘 하고 살아야 할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뭘까, 잘 할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이런 고민들을 합니다.
Q. 2W매거진에 기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음식을 소재로 쓴 글을 좋아합니다. 음식 에세이를 조금씩 읽다보니 나도 써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생각나는 대로 글을 조금씩 써두었어요. 그쯤 우연히 2W매거진 편집장님 블로그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11호 ‘어떤 식탁’ 투고 안내글이 있더라고요. 실리든 안 실리든 일단 한 번 보내볼까? 그냥 말까? 고민하며 투고한 것이 매거진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소극적으로 다달이 주제만 흘긋흘긋 보다가, 27호 ‘덕질의 추억’ 주제를 보곤 ‘이건 투고 안 할 수 없잖아!’ 하며 두 번째 기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에세이 쓰기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쓰는 자체의 괴로움도 물론 있지만, 이 글을 누군가 볼 수 있는 곳에 올릴 때를 생각하면 한층 더 괴로워져요. 자꾸 의식하게 돼요. 의식하기 시작하면 주눅이 들고, 그러면 사소한 일기라도 두 개 쓸 거 하나 쓰게 되고, 하나 쓸 거 안 쓰게 되죠. 사실 혼자 노트에 쓰거나 비공개로 쓰는 건 싫고, 읽히기 위해 공개하기 위해 쓰는 거니까요. 양면인 것 같아요. 누군가 이걸 읽고 ‘나도 그래요, 잘 읽었어요, 위로가 돼요, 기분이 좋아져요’ 말해주면, ‘그래, 그냥 쓰면 돼’ 기뻤다가, 무반응과 반박의견을 보는 경험이 쌓이면, ‘역시 이 글은 잘못됐어’ 하며 슬퍼지는 거죠. 가끔은 지금처럼 ‘이달의 에세이’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 앞에서도 ‘이거보다 좋은 글이 많던데 이게 선정이 되어서 다른 필진들이 의아해할 것 같아…’ 하며 의심 또 의심합니다. 무슨 작가가 된 것도 아니면서 정말 별 걸 다 걱정한다는 게 웃겨요.
Q.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위에 썼듯이 전 ‘음식’에 관한 글을 야금야금 모으고 있어요(정확히 말하면 아직 글을 모은 단계는 아니고 메모를 모은 것이지만).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이든 아니든, 밥상에는 항상 어떤 감정과 이야기가 따라오는 것 같아요. ‘팬심’에 관한 글도 사부작사부작 끼적여 두었어요. 연예인 덕질을 엄청 적극적으로 하는 팬은 아니지만, 안방 1열 팬에게도 ‘마음’은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뿐 아니라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담아 팬심을 써보고 싶단 생각을 해요. ‘놀이터’ 이야기도 써보고 싶고, 육아서가 아닌 ‘내 책’과 육아 일상을 포갠 글도 써보고 싶어요. 생각만 합니다. 언제나 생각은 많고 실행력은 없어요. 김혼비 작가님처럼, 재미도 의미도 있는 글을 사는 동안 써볼 수는 있을까 하며, ‘매일 쓰기’를 선택하는 대신 ‘매일 고민만 하기’를 선택합니다.
필진들의 추천사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에 참 공감합니다. 야구도 혼자보다는 둘이 혹은 여럿이 볼때 더 신명나고, 보고 나서도 같은 야덕(야구덕후) 친구와 이렇고 저렇고 얘기하는 것 정말 좋아하거든요…!
이번 호에서 작가님이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덕메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라고도 하지요. 그만큼 덕메는 최애만큼이나 덕질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큰 요소!
이번 호 중 최고로 공감한 글이다. 디테일 하나하나 다 주옥같다. ‘킬링 포인트를 나노 단위로 돌려 보는’ 그 희열은 아이돌 덕후만이 알 수 있다. 내가 이 네덜란드의 작은 소도시에서 그 사귀기 어렵다는 네덜란드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다름 아닌 방탄소년단 아미였기 때문이다. 지난주엔 아미 친구 한 명과 같이 일본 라멘도 먹고 마사지도 받으러 갔다. 해외에서 외국인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그럼 바로 덕질을 시작하라! 내 네덜란드 덕매들에게 사랑을 전한다.
덕질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아! 비디오 녹화. 이야기를 읽으며 잠시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참 세상 좋아졌지요. 좋아진 세상에서 마음껏 덕질 하시기를... ^^
*이 글은 2W매거진 27호 <덕질의 추억>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 정가는 3000원이며 수익금은 여성들의 다양한 창작활동을 응원하는 데 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