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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파도의 상관관계

by 홍아미


혼자서 훌쩍 바다로 떠나고 싶은 날이 있다. 대체로 그럴 때는 인간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은 상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책과 일기장을 챙겨들고 가까운 바다로 향한다.


오키나와행 비행기를 탔을 때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그리고 목적지였던 후루자마미 비치에 도착한 날, 첫눈에 나는 이 바다를 좋아하게 되었다. 오키나와 자마미 섬의 대표 해변인 후루자마미 비치. 작은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니 포스터 칼라를 몇 리터는 뿌려놓은 듯 깊고 아름다운 파란빛과 마주했다. 오죽하면 외신에서 이 색을 표현할 말이 없어 ‘자마미 블루’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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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마미 섬에서의 일주일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변에 갔다.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함께 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자였다. 혼자 바다 가서 뭘 하냐고? 책 읽고, 일기 쓰고 스노클링 하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후루자마미 비치의 가장 좋은 점은 보트 투어 없이도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다는 점. 허리께 오는 깊이의 바다에서 총천연색의 산호와 다양한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다. 동남아의 유명 스노클링 포인트에 뒤지지 않는 풍경에 매일 수영을 해도 질리지도 않았다.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책을 읽다가도 한눈을 팔면 눈이 시리도록 파란빛에 잠시간 멍해져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럴 때면 파라솔 아래 비치 베드에서 몸을 쭉 뻗으며 한국에서 도망쳐오길 잘했다, 되뇌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혼자만의 온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후루자마미 비치에서 보내는 시간 하나만으로도,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한 달은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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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만난 J란 친구가 있었다. 대화 코드가 잘 맞았던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학원 수업에 가는 대신 노래방에 가고 분식집에서 수다를 떨었다. 꼭 붙어다니는 것이 우정의 깊이를 증명하던 시절이었다. 가족을 미워했던 J는 밤이 늦도록 집에 가기 싫어했고 나 역시 함께 있어주길 원했다.


그러다 J가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게 됐다. 혼자서 타지에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J는 매일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친구니까'. J가 밤낮없이 외국에서 나를 찾는 이유였고 나는 급식을 먹다가, 야간 자습을 하다가도 울고 있는 J를 위로해야 할 이유였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녀의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졸업 기념 여행을 계획하다가 돈 문제로 크게 싸웠다. 4년 동안 죽고 못 살 것 같던 우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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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우정’ 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우정이란 말엔 맹목적인 신뢰가 전제되어 있어서, 서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연애 관련 고민을 다루는 곳은 많지만 친구나 가족 관계에 대한 조언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다.


나는 우정도 파도처럼 삶의 주기에 따라 가까워졌다가 멀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종종 10대의 J와 내가, 이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한국의 거리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솔직하게 이 장거리 우정이 힘들다고 선언했을 것 같다. 그리고 거리를 두는 시간을 얼마간 가졌을 지도. 그 편이 의무감과 죄책감에 시달려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보다 우리의 관계엔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느슨하게 관계를 유지하다가 서로의 삶의 주기가 맞는 때에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아예 지금처럼 다른 곳으로 밀려가버렸을 지도. 어느 쪽이든 우정을 유지할 다른 방법도 있었을 거란 후회가 미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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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찾아보면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 정의되어 있다. ‘가깝게’ ’오래‘가 함께 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느낀다. 특히 20대는 삶의 변화가 많은 시기므로 생활 반경이나 관심사가 계속 바뀐다. 학창시절, 점심 급식 메뉴로 대화했던 친구들과 요즘은 직장 생활과 서울 집값을 고민한다.


오래 알았다고 해서 가까운 사이란 법은 없다. 오히려 성향, 관심사, 속한 세계가 달라지면서 몸도, 마음도 멀어지기 쉬운 것이 친구 사이,라 생각한다. 연애를 시작하면 우리는 맛집을 찾고 상처가 될 말은 조심하면서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는다. 새로이 누군가를 만날 때처럼, 우정이란 이름으로 관계를 방치해둘 것이 아니라 자꾸만 들여다보며 서로에게 더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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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친구 사이는 딱 바다와 나 정도의 관계가 좋지 않나 생각한다. 너무 좋아서 매일 만나고 싶을 정도로 열렬할 필요도 없다. 문득 그리워져서 만나러 가면, 오래도록 듣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언어를 들려주는 사이. 그래서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데워져 있는 친구와 오래오래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 있는 저 후루자마미 비치처럼.




양주연

뭍보다 물이 편한 바다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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