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프랑스 파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부러워하는 교환학생 시절은 결론적으론 행복했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방학이 길긴 했어도1년의 3분의 2는 학기 중이었으며, 좋은 성적을 받고자 치열하게 공부하진 않았어도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 자체를 따라가는 일이 조금은 벅찼다. 더군다나 같은 수업을 듣는 아이에게 인종, 언어 등의 이유로 차별이라도 당할 때면 자괴감에 며칠간 괴로워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서 먼 타지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렵게 느껴져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큰 위안이 된 건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먼저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을 지닌 나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준 고마운 친구들이 있었다.
독일 뮌헨에서 온 미리암(Miriam)은 누구나 금방 호감을 느끼게 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큰 입이 매력적인 예쁜 얼굴에는 거의 늘 미소가 번져 있었고, 작은 체구에서는 밝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친한 언니가 좋은 친구라며 그녀를 소개해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후 같은 학교 친구들과 종종 함께 어울리며 미리암은 몇 안 되는 친한 외국인 친구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유명한 옥토버페스트 기간에 나를 포함한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기꺼이 초대해주었다. 그때는 전 세계에서사람들이 몰려 뮌헨에 숙소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엄두도 못 냈는데, 그녀 덕분에 첫 독일 여행이 성사되었다.
함께 가기로 한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뮌헨에 도착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방 3개짜리 널찍한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사적인 공간 일부를 내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그녀는 그 외에도 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었다. 뮌헨 곳곳의 단골집을 소개해주었으며, 웬만해선 식사도 함께했다. 며칠간 그녀와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독일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그녀의 일상 속에서 친구들은 곧 가족이었다. 집을 나눠쓰는 두 커플을 비롯해 다양한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즐거운 추억을 쌓고 있었다.
즉, 내가 있는 집은 모두의 사랑방인 셈이었다. 미리암과 그녀의 쌍둥이 동생, 그녀들의 남자친구들, 오랜 친구들, 취미로 하는 밴드의 멤버들, 그 친구들의 친구들까지 수시로 드나들며 자연스레 어울리는 모습은 거의 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질 만큼 인상적이었다. 별것 없이 그저 좋은 사람들과 일상을 공유하며 웃고 떠드는 소박하고 행복한 삶은 내가 그리는 이상이었다. 며칠 간의 관찰(?)을 통해 이 모든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인 아침과 저녁 식사 시간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미리암과 그녀의 쌍둥이 동생은 채식주의자였다. 다만 어떤 일을 계기로 오래전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말했을 뿐, 그 이유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식사 시간에 튀거나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동네빵집에서 사 온 라우겐프레첼, 잘 익은 아보카도를 으깨 토마토, 레몬즙을 넣어 만든 과카몰레에 우유, 주스 등을 곁들여 먹는 간단한 아침 식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많은 이가 모여식탁이 좀 더 풍성해지는 술자리에서조차 식사 시간은 훈훈하기만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궁금증은 옥토버페스트 첫날에 풀렸다.
나름대로 독일 민속 의상을 갖춰 입고 축제를 즐길 채비를 마친 우리 일행은 축제에 함께 가기로 한 미리암의 남자친구 알렉스네 집으로 향했다. 맥주를 잔뜩 마시기 전에 배를 살짝 채울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미리암이 우리를 이끈 곳은 채식을 위한 식재료가 그득한 채식 마트였다. 일단 채식 전용 식료품점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는데, 마지막으로 들른 냉장 코너에는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칸마다각종 소시지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미리암은 태연하게 소시지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았다. 알고 보니 채식주의자를 위한 소시지였다. 정확히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콩고기와 비슷한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리고 알렉스네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의 소시지를 맛있게 먹으며 열광적인 축제를 위한 기력을 보충했다.
정작 그때는 몰랐지만, 이후 한국에 돌아와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야 얼마나 독일이 육식만큼이나 채식이 발달했는지 깨달았다. 나의 채식 생활은 6개월을 조금 넘기고 끝이 났다. 물론 의지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사회생활을 하면서 채식이 어느 정도의 걸림돌이 되는 일이 많았다. 외식하러 음식점에 가면 채식 메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굳이 까다롭게 채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주변의 물음에거의 매일 답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뮌헨, 미리암, 독일 친구들을 떠올렸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즐겁게 어울리던그들을.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비법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양슬아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반대로 맛없는걸 먹을 때 유난히 화가 난다. 궁극적으로 매끼니 주변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든 정성스런 요리를 먹는 호사스런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