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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싶은 여행이 기억되는 법 (1)

by 홍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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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금화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출근길이었다. 꽉 찬 만원버스가 터널을 빠져나가자마자 눈앞에 하얀 백사장이 펼쳐졌다. 짚으로 만든 파라솔, 얕게 밀려오는 바다, 맨발에 닿는 젖은 모래... 태국의 코팡안 해변이었다.

우기의 태국엔 비가 다정하게 내리고 있었고 해수욕을 할 계획이 어그러진 나는 수영복을 입은 채 리조트 레스토랑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실커튼을 만들며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밤 꿈의 영향일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기억의 습격을 받은 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코 팡안 여행을 그리워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IMG_1482.JPG?type=w740 ⓒ 양주연


IMG_1513.JPG?type=w740 ⓒ 양주연


혼자 한해를 정리하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다. 삶의 변화가 유난히 많았던 2015년, 연말 분위기에 휩싸이는 대신 떠나보낸 이들과 새로이 삶에 들어온 이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보고 싶었다. 꽤 오랫동안 공들여 여행지를 서치한 후, 혼자 오는 여행자가 많은 조용한 해변가 리조트를 골랐다.

불운은 코 팡안으로 가는 배에서 시작됐다. 하필이면 파도가 거센 날이었다. 바이킹이라도 탄 듯 격하게 좌우로 흔들리는 배 안에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옆 자리 사람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이름은 마틴. 2m 쯤 되는 키에 얼굴이 길쭉해 북유럽 신화에 나올법한 도깨비를 닮은 스웨덴인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6개월째 아시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코 팡안엔 왜 가냐, 어디서 묵을 거냐 물으니 아직 정한 게 없다고 했다. 나는 코 팡안 동쪽 해변가 리조트에 간다고 말했다. 그때 열심히 설명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원래는 하와이나 필리핀에 가려고 했는데 부킹닷컴에서 지금 내가 예약해둔 리조트 사진을 보고선 여기다! 싶어서 코 팡안으로 여행을 오게 됐다며 신나게 썰을 풀고 있는 나에게 그는 정확히 이렇게 얘기했다. “Can I go with you?".

71027928.jpg ⓒ Nice sea resort / 나를 코팡안으로 이끈, 문제의 사진


1초 남짓 짧은 시간동안 머릿속에선 그 말인 즉슨, 내 리조트에 자기도 묵겠다는 뜻이겠지? - 그 리조트 태국 물가 치곤 비싼데 - 너 돈 있냐고 물어볼까? - 내가 얘를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생각들이 스쳐갔고, 내 입에서는 쿨하게 오케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이 장면은 내가 여행 내내 떠올리게 될 순간이었다.

섬에 도착하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리조트까지는 트럭을 타고 1시간 정도 가야하는 상황. 갑자기 그가 매우 친절하게 굴기 시작했다. 리조트까지 가는 가격을 흥정하고, 내 짐을 다 실어주더니 내릴 때 계산도 자기가 하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일단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체크인을 했다.

그런데 체크인이 끝날 때까지 그와 그의 또 다른 친구는 뭔가 쑥덕거리기만 하고 방을 예약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 최대한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마틴에게 너네는 어디서 묵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마틴은 놀란 표정으로 ”너 방에 같이 묵는 줄 알았는데! 너 방 넓다며!“ 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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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같이 여행 내내 다녀도 되냐’는 뜻으로 물어본 것이었고, 나는 거기에 쿨하게 오케이라고 해버린 것. 잠시 3초간 정적. 나는 정신을 차리고선,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남자친구도 있고(없었지만) 방을 같이 쓰는 건 불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당황하며 오 알겠어, 하며 카운터에 가서 제일 싼 방이 있냐 물어봤지만, 빈 방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변 리조트 역시 성수기라 만실일거란 대답과 함께.

그때 오지랖 넓은 주인장이 "제일 비싼 독채 빌라를 네가 예약한 가격(약 8만원 가량)에 줄게. 셋이 나눠 내면 되지 않아?" 라고 제안을 해왔다. 방 두개짜리에 스파도 있다고, 이건 빅딜이라며 주인장은 신이 나 설명하고 있었고, 두 남자는 나를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스위트 빌라에 언제 묵어보겠어.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며 또다시 오케이를 외치고 말았다.

- 다음 (2) 편에서 계속됩니다.



양주연
뭍보다 물이 편한 바다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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