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생활의 끝자락, 고등학교 친구와 팀을 이뤄 우연히 공모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좋은 결과를 얻어 독일에서 열리는 한국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독일행이 결정되자마자 국제 대회와 여행을 함께 준비했다. 국제 대회가열리는 곳은 공모전을주최한 헨켈의 본사가 있는 뒤셀도르프라는 도시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러 팀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보다 모처럼의 유럽, 그것도 가본 곳이라고는 뮌헨과 하이델베르크가 전부였던 독일로의 여행에 대한 설렘이 컸다.
얼마 후 비행기를 타고 헬싱키를 경유해 뒤셀도르프에 도착했다. 다음날, 국제 대회의 막이 올랐다. 일정 안에는 총 3라운드로 진행되는 대회뿐만 아니라 참가자들끼리 소통과 교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부 영어로 소화해야 하는 일정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나라의 또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우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은 즐거웠다. 틈틈이 구경한 뒤셀도르프도 아름다웠다. 참가자들이 모두 함께한 세그웨이 투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뒤셀도르프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난 후 3일간의 독일 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팀원으로서 많은 의지가 되어준 친구와는 오랜 세월 친하게 지냈지만, 같이 여행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과연 여행 스타일이 맞을지 살짝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계획을 짤 때부터 의견 차이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 친구 덕을 크게 봤다. 당시 운전을 전혀 못 했던 나와 달리 그 친구는 운전이 익숙했고, 덕분에 우리는 기차가 아닌 차로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닐 수 있었다.해외에서의 자동차 여행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매번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은 상당히 편리했다. 무엇보다 그 유명한 ‘아우토반’을 시속 150km로 달려볼 수 있었다.
뒤셀도르프에서 출발해 브레멘, 함부르크, 슈타데를 거쳐 다시 뒤셀도르프로 돌아오는 여정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없이 여유로웠다. 함부르크에서 손흥민 선수가 출전하는 축구경기를 보기로 한 것 외에는 딱히 해야만 하거나 정해진 것이 없었다. 아침 느즈막이 일어나 느긋하게 준비하고 돌아다니면 하루가 끝났다. 뒤셀도르프에 이어 독일에서 두 번째 목적지였던 브레멘은 어릴 적 추억에 의존해 고른 여행지였다. 지도에서 ‘브레멘’이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그림 형제의 동화<브레멘 음악대>를 떠올린 것이다. 다른 배경지식 없이 오직 이름으로만 고른 도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보통 ‘유럽’ 하면 떠올리는 아기자기한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골목골목을 산책하며 브레멘 음악대의 흔적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녁으로는 온라인에서 평이 괜찮은 레스토랑에 가서 독일 음식을 먹기로 했다. 소시지, 바비큐, 감자요리, 맥주가 아닌 독일 음식은 어떨지 궁금했다. 마침 그 레스토랑은 지역 토속 음식이 맛있다고 했다. 좁은 골목 깊숙한 곳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레스토랑은 분위기가 무척 포근했다. 폭이 좁은 2층짜리 목제 건물에는 고즈넉한 세월의 흔적이 넘쳐흘렀고, 현지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단란한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살펴봤다.영어로 된 설명을 읽으며 아무리 연구해도 어떤 음식인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고심 끝에 두 가지 메뉴를 선택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우리에게 충격을 안긴 ‘훈제 장어(Smoked Eel)’였다. 당시엔 둘다 초딩 입맛에 가까웠는데, 어떻게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이제 찾아보니 독일 북부의 어부들은 그 지역의 강과 호수에 서식하는 장어 잡이로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또한, 독일 전역으로 판매된 장어는 지역마다 특색 있는 요리로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장어는 훈제된 것이었다. 그 옆엔 한눈에 보기에도 부드러운 메시드 포테이토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장어 요리였지만, 호기롭게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순간 비릿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 졌다.
맞은 편을 보니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봐도 방금 먹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도저히 그 음식을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나머지 음식은 다 먹었는데,장어만 그대로 두자니 요리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음식이 너무 맛없다기보다는 우리에겐 생소했을 뿐이었기 때문에 오해를 사고 싶지않았다. 잠깐의 상의 끝에 우리는 장어를 덮기로 했다. 빠른 손놀림으로 장어 조각을 매시드 포테이토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감자 무덤이 완성되자 왠지 죄책감이 덜어진 듯했다. 만족스러웠다. 음식을 거의 다 남겼지만, 돈이 아깝지 않기는 또 드문 일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종종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낄낄댄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맛을 꼽으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훈제 장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양슬아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반대로 맛없는 걸 먹을 때 유난히 화가 난다. 궁극적으로 매끼니 주변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든 정성스런 요리를 먹는 호사스런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