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로에서 만난 보석, 로컬 마켓
나는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자주 가지 못하지만, 갈 때마다 거북이걸음으로 시장을 즐기곤 한다. 시장에는 언제나 푸근함이 있다.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참 여러모로 설렘을 느끼게 한다. 시장 자체도, 판매되는 물건도, 상인들에 대한 기대도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장터일 뿐인데 말이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각 지역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이 늘 즐겁다. ‘시장’이라는 익숙함이 오히려 낯선 여행지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가 파머스 마켓은 내게 놓칠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파머스 마켓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유쾌한 웃음도 들린다. 이들은 대부분 하루가 멀다고 만나는 동네 주민일 텐데 그래도 언제 봤냐는 듯 수다거리가 끊이질 않는다. 손님들의 차림새를 봐도 이 사람이 동네 주민인지 여행객인지 한눈에 스캔이 된다. 크고 작은 파머스 마켓 중에서도 여행객을 상대로 하는 마켓은 분명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마켓은 현지에서 가장 유명하답시고 알려는 졌지만 현지 문화를 접하기보다 많은 여행객 속에 정신만 ‘쏙’ 빼놓고 오는 꼴이 된다.
빅 아일랜드 힐로에서 열리는 ‘힐로 파머스 마켓(Hilo Farmers Market)’은 하와이 섬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마켓이다. 현지인도 여행객도 많이 찾고 주중 내내 열리는 탓일까. 힐로라는 도시가 가진 이미지와 마켓은 참 잘 조화된다. 힐로는 하와이 제2의 수도나 마찬가지이다. 수도라곤 하지만 힐로 도심은 ‘도심’이라고 표현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담하고 정겹다. 마치 1970~19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빌딩 숲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단층 혹은 높아야 2~3층 높이의 건물이 대다수이지만, 세월의 때가 벗겨지지 않은 목조 건물 하나하나가 강산의 변화를 무심케 한다.
전통 오일장을 떠오르게 하는 지붕 아래 펼쳐진 마켓에 다가가니 풋풋한 채소에는 흙냄새가 묻어 있고 정원에서 막 뽑아 오기라도 한 듯한 꽃에선 향기가 잔잔하게 콧등을 스친다. 제철 열대 과일은 색이 얼마나 다양한지 모른다. 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꿀맛 일터이다. 가격 또한 얼마나 착한지! 하나를 사면 다른 하나를 덤으로 맛볼 수 있고 서너 개 정도 더 넣어주는 후한 인심 또한 잊지 않는다. 이것저것 계속 물어보는 손님이 귀찮을 만도 한데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는다. 살까 말까 주삣쭈삣 망설이기라도 하는 것 같으면 호객 행위 대신 조용히 기다려 준다. 그 기다림은 오히려 지갑을 열게 만든다. 이른 아침 재배한 채소를 가져와 팔던 ‘챙 아저씨’, 과일을 가져 나온 ‘크리스 할머니’ 직접 양봉한 꿀이라며 샘플을 건네던 ‘무차스’ 무스비와 도시락을 만들어 팔던 ‘엠마’는 그날 아침의 상쾌한 기분과 함께 따뜻한 미소를 내게 선물해줬다.
엠마가 이른 아침 만들어 낸 도시락은 막 지은 듯 고슬고슬한 밥 위에 에그 스크램블과 스팸 두 조각이 올려 있었다. 스프링 롤은 한입에 베어 먹기 힘든 만큼의 크기였고 싱싱한 채소로 무장해 있었다. 크리스 할머니는 과일을 산 후, 원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주스를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오렌지와 파인애플로 생과일 주스를 만들었다. 파머스 마켓 건너에 있는 피크닉 테이블에 나만의 아침상을 차렸다. 마켓 앞으로 힐로항이 있지만, 마켓을 바라보고 싶어 항구를 등지고 앉았다. 음식을 꼭꼭 씹어 먹었다기보다 사람 구경을 하며 세월아 네월아 하다 보니 아침 먹는 속도가 평소의 몇 배나 더 걸린 듯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혼자 ‘피-씩’웃기도 하고 그러다 내뱉는 웃음에 밥 한 톨 ‘툭’ 튀어나와도 즐거웠다. 마켓은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한없이 느긋해지는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파머스들의 표정도 평화로워 보였다. 애써 경쟁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두 다 팔아야겠다는 욕심조차 없어 보였다. 마냥 한없이 펼쳐진 넓은 땅이 머금은 기운처럼, 그들의 마음도 그런 듯싶었다. 그렇게 힐로 파머스 마켓에서 땅을 일구는 농부를 보며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그러다 며칠 뒤 지역 잡지에서 처음 보는 마켓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모르면 ‘뭐지?’하고 그냥 지나칠법할 수 있는 곳에서 현지인들 사이 ‘핫’한 그런 마켓에 대한 기사였다. 비슷비슷한 마켓이지만 왠지 모를 끌림이 날 움직였다. 마켓이 열리는 곳은 힐로 도심에서 20여 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키아우(Keaau)와 파호아(Pahoa) 사이에 있는 한 공터에서 열리는 마쿠우 파머스 마켓(Maku’u Farmers Market).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움직였더니 이미 공터 한 편엔 차가 가득했다. 시장에서 내뿜는 각종 음식 냄새는 차의 속도를 부추기에 충분했지만 마켓에 들어서려는 차량 행렬로 더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차량당 1$이라는 입장료가 있었다. 그 정도야 기분 좋게 냈다. 주차는 입구에서 꽤 먼 거리에 해야 했다. 이미 찾은 사람이 많다는 것.
마켓이 펼쳐진 입구에 시선을 잡는 화분이 하나 있었다. 변기를 재활용해 화분으로 만들어뒀는데 꽤 신선한 발상 같았다. 마르셀 뒤샹의 「샘」 만큼이나 말이다. ‘또 이렇게 경계가 허물어지는구나’ 생각하며 파머스 마켓에 들어서니 시작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많다. 점심시간이 되어가서인가 꽤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오후 2시가 되면 끝나는 이 마켓의 클라이막스쯤 되는 것 같다. 중국 골동품 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더니, 이곳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힐로에서 생산되는 식재료와 음식은 기본, 세계 각국의 아이템이 모두 모인 듯했다.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예품부터 인도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곳까지 있는 걸 보며 ‘대단한데’ 싶었다.
‘단순한 파머스 마켓이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마켓의 비밀을 풀었다. 현지인들의 참여로 이뤄지는 마켓이긴 하지만, 이 중 50%는 해외에서 빅 아일랜드가 좋아 이주했거나, 잠시 머물며 생활하는 이들이 판매자(Seller)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켓의 물건은 다양성을 띠었다. 마켓을 돌아보며 간식거리로 팬 케익과 먹기 좋게 포장된 열대 과일을 사서 배를 채웠다. 그러며 사람 구경 물건 구경하다 보니 신명 나는 음악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투명하고 톡톡 튀는 악기 소리와 더불어 연주자들이 맞춰 입은 알록달록 무지개색의 의상 역시 볼거리였다. 나무로 만든 악기들이 내는 소리와 더불어 너무나도 흥겨운 연주에 내 몸은 나도 모르게 들썩이고 있었다. 연주자들 역시 흥이 나는지 연주 도중 자리에서 일어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몇 분에 걸친 연주가 끝나고 감사의 의미로 지갑에서 지폐를 꺼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팁을 냈다. 흥겨운 연주를 들었으니 이렇게 쓰는 몇 달러의 돈은 기분 좋은 소비다.
우연히 본 기사 덕에 찾은 파머스 마켓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중독성 있는 연주를 들었다. 그 멜로디가 좋아 영상을 찍어두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직도 그 통통 튀는 소리와 멜로디는 내 귓가에 선하다. 그 멜로디는 여기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화합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
파머스 마켓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 사람 소리와 음식 만들며 내는 정리되지 않은 음표만큼 현장감 가득한 멜로디는 없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들은 잊을 수 없는 몇 분간의 연주는 마치 파머스 마켓을 페스티벌로 만드는 힘을 가진 소리였고, 어제일 마냥 기억을 되살리는 마술 같은 힘 또한 가지고 있는 멜로디였다. 그렇게 나는 힐로의 한 파머스 마켓에서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곳으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행을 다녀온 듯했다.
박성혜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