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채 빌라는 주인 말대로 아주 좋았다. 킹 사이즈 베드가 놓인 방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 형태에, 문을 열자마자 고운 모래가 밟히고 몇 걸음만 걸으면 해변이었다. 바로 내가 찾던 숙소였기에 한눈에 꼭 마음에 들었다. 예상치도못하게이곳에서 2박 3일을 지내게 됐다. 그것도 멀대같은 스웨덴 남자 둘과 함께. 판단할 겨를도 없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으나, 결론적으론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하게 유쾌한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드는 탓에 스웨덴판 노홍철 두 명과 함께 있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으니. 평소의 여행 마인드라면 “어떻게든 잘 되겠지!” 하며 그 상황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꿔온 계획이 파괴된 나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다음날, 나는 쿨 타임을 선언했다. 한국에서 휴가 중 업무 연락을 받았다며,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두 친구에게 말하니, 둘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알겠단다. "그렇다고 우리를 쫓아내지 않을 거지?"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나가라고 말했으나 거절당함)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싶었으나 하루종일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리조트 레스토랑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앉아 있었지만 마음이 심란했다. 빈 한글문서처럼 머릿속은 백지 상태. 한해를 되새김질하기는커녕, 이번 여행이 꼭 한해의 압축 체험판처럼 느껴져서 우습기만 했다. 결국 수영도 못하고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비 내리는 바다 구경만 하다가 하루가 지나갔다. 이대로 여행을 끝낼 순 없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풀문파티에나 가자.
코팡안은 보름달이 뜰때마다 해변에서 큰 파티가 열리는, 아시아의 이비자섬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코팡안 풀문파티가 때마침 며칠 뒤에 열린다는 정보를 읽긴 했으나 내가 정말 그곳에 가게 될 줄이야.게다가 이번 파티는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열리니 평소보다 더 화려한 파티일 것이다. 저녁에 슬쩍 두사람에게 풀문파티에 가겠냐고 하니, 또 긍정 넘치게 굿 아이디어! 라고 외친다.
코팡안 풀문파티는 섬의 반대편 끝에 있었다. 두 시간 동안 트럭을 타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산길을 내려갔다. 고생 끝에 파티 장소에 도착해 알게 된 사실은, 우리가 파티 전날 도착했다는 것. 축제가 열리는 날은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는데, 내가 날짜를 착각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게된 것이다. 심지어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해변에서 열리는 대형 불쇼들마저도 모두 취소됐단다.
메인 도로는 허벅지까지 물이 불어나 있었고 나처럼 파티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이 해변가 클럽에 삼삼오오 모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코팡안 풀문파티도 못 보게 된 나는“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어떻게 이래?!”하고 절규하는 수밖에. 착한 친구들은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숙소 가서 술이나 먹자며 나를 달래고 있고. 그날 밤, 여행이 이렇게 망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굉장히 우울해졌다.
여행이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란 건 알지만그럼에도 결국엔 그 변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번 여행은 아쉬움만 가득했다. 일년에 한번 뿐인,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긴 휴가가 이 모양이라니. 내 연차, 내 돈, 내 시간... 이번 여행을 위해 썼던 모든 것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한없이 우울했던그밤, 어둠을 노려보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곱씹었다. ‘될대로 되라’ 하며 상황을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똑 부러지게 두 친구를 쫓아냈어야 했나,좀 더 꼼꼼히 사전 조사를 할 걸 그랬나. 자책은꼬리에 꼬리를물어 “여행을 괜히 왔다”에서 멈추었다. 내 여행 역사상 단 한번도 한적없던 생각이었다. 코팡안을 떠나는 길, 이곳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여행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그러니까 출근길에, 2년이나 지나서 코팡안이 떠오른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그립고 예쁜 기억으로 말이다.
어째서 고생스러웠던 여행이 그리워지는가? 그 답은 우연한 계기로 찾아왔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집 속 작가의 말을 읽을 때었다. "그저 누군가의 풍경이기도 했다고 생각하면. 풍경이라는 건 우리가 살아서 어디든 걸으면 될 수 있는 것이니까.”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나에겐 저 문장이 기억 왜곡 현상을 설명해줄 정확한 해답이었다. 이번 기회로 알게된 것은,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기억이 휘발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모든 경험이 추억이 된다고 믿지 않는다. 분명 고생했던 경험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되고 그래서 실제로 종종 과거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행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괴로웠던 감정은 사라지고 하나의 풍경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된다.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처럼, 한발짝 떨어져 언제든 거닐며 들여다볼 수 있는 풍경이 되는 것이다.
‘이것 또한 풍경이 되리라.’ 여행이 힘들어질 때면 정신승리를 위한 나만의 주문이다. 열심히 (내가) 준비해 가족여행을 갔지만 부모님이 집에 있는게 나을 뻔 했다는 말을 해도 빙긋이 웃음까지 지을 수 있게 됐다. 힘든 기억은 사라지고 지금 내 앞의 바다, 노을, 웃음소리만 이 여행의 풍경으로 남아 있을테니. 혹시나 여행지에서 현타가 왔을 땐, 마법의 문장 ‘언제든 거닐 수 있는 풍…경…’이라고 세번 말해보자. 그리고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여행지를 충분히 감각하자. 나중에 이 여행을 떠올릴 때는 고생이 아니라 그 생경한 감각이 그리움이 되어 있을테니.
양주연
뭍보다 물이 편한 바다형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