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사를 그만두기 전, 마지막 출장지는 캐나다였다. 매년 10월 무렵, 캐나다 여행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저널리스트들이 모이는 큰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추석 연휴도 반납하고, 캐나다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유럽이나 일본 쪽만 경험했지 미주대륙은 처음 밟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심 차게 비행기 표를 연장해 개인적인여행 일정을 덧붙이기로 했다. 멜버타주의 에드먼튼과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팬틱턴까지의 정식 일정이 끝나면 밴쿠버에서의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는생각에 출장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니키는 애드먼튼에서 처음 만난 프리랜서 기자였다. 영국 출신이지만, 캐나다와 사랑에 빠져 지금은 밴쿠버에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캐나다는 처음이며, 출장 후 밴쿠버 여행을 한다고 했더니 너무 반가워했다. 그때부터 그녀의 헌신적인 도움이 시작되었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밴쿠버 관광청 담당자에게 얘기해 밴쿠버 여행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여행 패스를 얻어준 것을 비롯해 밴쿠버를 돌아가서는 따로 시간을 내 저녁 식사를함께하고, 내가 떠나는 날 집으로 초대해 스탠리 파크에서 자신의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한 것까지 진심으로 나를 위해 여러모로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밴쿠버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날, 그녀의 동네에서 만난 우리는그녀의 단골 바에 먼저 갔다. 그녀는 주로캐나다 여행 전반과 밴쿠버의 식문화에 대한 글을 쓴다고 했다. 그러니 그녀가 선택한 바가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바텐더와 편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를 소개하더니 자연스레 술과 가벼운 안주를시켰다. 어떤 음식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꽤 맛있었다는 느낌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우리는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녁으로 양념치킨을 먹고 싶다고 했다. 한국 치킨집의 양념치킨을 자주 먹는데, 한국인의 입맛에도 정말 맛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캐나다는 매해 이민자가 25~30만 명씩 늘고 있으며, ‘이민자가 살기 좋은 나라’에서도 상위를 차지하는 나라인 만큼 다양한 식문화가 발달해 있다. 캐나다에 가본 적도 없던 대학 시절, 밴쿠버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했던 친한 친구를 통해 실제로 그런 얘기를 접한 적도 있었다. 당시 나도 프랑스에 있을때라 ‘한국 음식이 그립지않냐’고 물어보면 ‘나는 여기서 인생 순댓국을 먹었다’는 의외의 대답을 듣곤 했다. 더불어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 등 각 나라의 음식이 밴쿠버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양념치킨이라는 선택지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머나먼 땅에서 인기 있는 양념치킨의 맛이 궁금했다. 평소 후라이드가 아닌 양념을 편애하는 양념파이기도했고.
얼마쯤 걸었을까 한식당이 몰려 있는 거리가 나왔다. 여기저기에서 한국어가 보이고, 간간이 한국 노래도 들려오니 여기가 한국인지 캐나다인지 잠시 헷갈렸다. 니키가 안내한 곳은 그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곳인 것 같았다. 살짝 웨이팅을 하고 나서 사람들로 가득 찬 식당 안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안 풍경은 더 한국 같았다. 우리 대각선에 있는 테이블에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일행이 한창 ‘술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마냥 놀라워하는 사이 드디어 양념치킨이 나왔다. 우선 모양새는 합격이었다. 그리고 한 입, ‘바삭’ 소리와 함께 밴쿠버 양념치킨을 처음 맛봤다. 기껏해야 KFC 치킨에 달달한 양념을 묻혔을 거란 나의 예상과 달리 제대로 된 양념치킨에 한 방 먹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먹은 웬만한 양념치킨보다 더 맛있었다. 창피하게도 니키보다 훨씬 더 열심히 먹은 것 같다. 니키는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했다면서도, 이런 양념치킨을 알아본 자신의 안목에 뿌듯해했다.
만족스런 치맥 타임은 우리 사이를 한층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소화도시킬 겸 바닷가로 나선 산책에서 이제까지보다 더 깊고 친밀한 대화를 편하게 주고 받았다. “니키, 너는 너의 고향인 영국도 좋은 곳인데, 굳이 왜 먼 캐나다까지 와서 살아? 영국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곳이잖아. 역사도 깊고."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니키는 현명하게 답했다. "나는 이렇게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에너지가 너무 좋아. 역사가 쓰이는 현장에 있는 기분이 얼마나 멋진데." 늘 유서 깊고 이미 완성되어 있는 무언가를 선망했던 나에게는 경종을 울리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일면식도 없던 나에게 이런 호의를 보여줘서 진짜로 고마워." 그리고 이어진 니키의 말은 그때 본 멋진 노을과 함께 마음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너도 누군가를 어디선가 만났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어 줘. 나는 그거면 될 것 같아."
양슬아
‘먹고 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반대로 맛없는 걸 먹을 때 유난히 화가 난다. 궁극적으로 매끼니 주변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든 정성스런 요리를 먹는 호사스런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