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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Dec 13. 2017

오키나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생긴 일


게스트하우스를 떠나는 날 찍은 단체사진은 일본 청춘 영화의 한 장면같다. 무심함을 연기하는 주인장 히로상, 지치지도 않고 발랄하던 이요리, 말은 통하지 않지만 좋은 사람이란 걸 느낌으로 알 수 있던 게스트하우스 스텝들. 그리고 나는 여행지에서만 나오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나중에 두고두고 그리워할, 예상치 못한 행복에 겨운 얼굴이다.


5월 황금연휴엔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여유가 없는 내 마음의 크기에 꼭 맞는 섬에서 일주일쯤 갇혀 있고 싶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오키나와의 자마미 섬이었다. 볼거리라곤 아마 해변, 후루자마미 해변 두 곳이 전부고, 그마저도 시내에서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었다. 자마미 섬의 ‘별 것 없음’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섬과 금방 친해질거란 예감이 들었다.



좀 이상한 숙소와의 첫만남     


 혼자 여행을 떠날 때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은 숙소다. 너무 오래 혼자 있다보면 외롭고, 또 매일같이 시끌벅적한 파티가 열리는 곳에선 금세 에너지가 바닥나버린다.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게스트하우스 2곳과 민박 싱글룸을 예약했는데, 그 중 한 게스트하우스가 어딘가 찜찜했다. ‘일본 전통 민가를 개조한 소규모 파티 게스트하우스’라는 설명에 끌려 예약을 했으나 구글을 뒤져 봐도 사진 한 장이 나오지 않았다. 다다미방에 이불을 깔고 여러명이 함께 잔다는, 듣도보도 못한 도미토리 형태를 열심히 상상해보아도 군대 내무반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자마미 섬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그 게스트하우스를 확인하러 갔다. 영 아니면 숙박비를 날리고서라도 다른 곳을 찾아야 할 테니까.                            

            


아카바나 게스트하우스의 첫인상은 시골 할머니의 한옥집 같았다. 나무로 지어진 일본 가옥이었고 대청마루가 있었다. 이불이 쌓여 있는 커다란 다다미방 한가운데 커튼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혼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마루와 방 사이에 문이 없었고, 정해진 수용 인원도 없다는 것이었다. 말수가 적은 주인 아저씨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빈자리 있냐는 질문에 ‘음.. 예스!’라고만 답을 했다. 아무래도 머릿속에서 사람들을테트리스 하듯 요리조리 눕혀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미 숙박비는 다 낸 상태.      


혼란에 빠져 있는데 웬 노란머리 아저씨가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 물어왔다. 해변에 갈 거라고 답하자 같이 가자한다. 이번엔 아저씨까지 추근덕거리는건가 싶어서 더욱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자마미섬 매니아 타케시상 


그의 이름은 타케시 상. 추파를 던진다는 건 나의 크나큰 오해였다. 그는 모두에게 고르게 친절한 프로여행자였다. 얼마나 친절했냐면, 해변에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으니, 갑자기 옆에 있던 통나무를 바다 근처로 굴리더니 포토스팟을 만들고선 사진을 찍어주겠다 하지 않나, 자마미 특산 음식이라면서 이것저것 밥도 사주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를 여기저기 데려다니며 소개시켜주었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가 없는 친절이었다. 물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도쿄의 카드 회사 영업사원인 타케시상은 두달마다 한번씩 자마미섬으로 여행온다고 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걸 남들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에 열심히 자랑하는 아이같았다. 나의 짧은 이해론, 그의 친절을 그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한여름밤 소동같은 프로포즈 


어떤 밤엔 커플의 프로포즈도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타케시상의 주도로 식당에 게스트들이 한 자리에 둘러 앉았다. 귀여운 동갑내기 여자 대학생 셋, 전자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 둘, 혼자 온 아저씨 몇몇과 5년째 연애 중인 커플이었다. 일본이라고 다를 것 없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앉은 사이에선 데면데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다 술잔이 몇차례 돌아가자 와아 웃음이 터지고 핑퐁처럼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일본어라 정확한 내용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분위기상 커플의 연애담이 화제인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의 마당으로 자리를 옮겨 술자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커플 중 여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갑자기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뭔가를 준비했다. 옆의 아저씨들이 남자 어깨를 두드리며 기합을 넣었다. 여자가 방에서 나오자 남자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숨겨둔 술병을 머리위로 치켜들고선 “앗쨩 결혼하자!!!”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뭐야, 여기서 진짜 결혼 프로포즈라고?’ 생각했고 여자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장난치지 말라며 웃어 넘겼다.


머쓱해진 남자는 웃으며 ‘아 실패했네요’ 했지만 다른 게스트들은 명장면을 기다리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기합을 넣고선 결혼하자!!고 외쳤고 게스트들은 “츄우- 츄우”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허락의 뽀뽀를 부추겼다. 여자는 난처한 얼굴로 계속되는 응원가에 결국 남자의 입에 뽀뽀를 했다. 오키나와 게스트하우스에서 프로포즈라니!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함께 항구로 나가 별을 보는데, 이 커플이 부부가 된다면, 두고두고 떠올릴 프로포즈 장면 속에 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정말 별일이 다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이곳에서 살아볼 수 있다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황금연휴를 맞아 게스트들이 계속 나가고 들어왔다. 이불을 요리조리 잘 깔면 무한히 손님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던 게스트하우스의 다다미방도 만실이 되었다. 주인장은 신이 났는지 오늘 저녁엔 야외 바베큐를 열겠다며 예약을 받았다. 1인당 3000엔짜리(약 3만원 가량) 바베큐는 정말 맛이 없었다. 어둠속에서 센 불로, 그것도 대량으로 구운 삼겹살은 핏기가 남아 있거나 타 있었고 호일로 감싸 구운 생선은… 왠지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스텝 친구를 보러 놀러온 유이치와 타로상을 만났다. 일본 본토에서 온 두 사람은 각각 27,29살로,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자마미섬에서 한달간 일하고 있었다. 'workaway'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마미섬을 알게 됐는데, 오키나와에서 한번 일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식제공을 받고 몇개월간 스텝으로 일하는 개념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반짝,하고 마음 속에선 작은 흥분이 일었다. 한달 혹은 세달쯤 이 섬에서 살아볼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마트에서 벤또를 먹고 해변에 가서 수영을 하고 책을 읽다가 저녁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맥주 한 잔하는 삶을 한달씩이나 할 수 있다니. 그 삶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이 섬을 떠나는 날은 황금연휴의 끝무렵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마지막 밤 히로상은 여름 하나비 시즌에 쓰는 불꽃놀이를 게스트하우스 사람들 손에 하나씩 쥐어주었다. 마당에서 사람들 여럿이 모여 불꽃을 터뜨리며 놀았다. 오키나와에서 불꽃놀이라니, 일본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단 한번뿐일 이 청춘영화를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싶어서 손끝의 불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때는 몰랐다오키나와에서 일었던 작은 흥분이 삶을 바꿀 줄은오키나와에 다녀온 6개월 뒤 직장을 옮겼다하기 싫다고 불평하던 일을 그만두고 원하던 여행 관련 일을 하고 있다선택하기만 하면 언제든 가능한 삶이 내 앞에 놓여있을 때자연히 내가 현재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버릴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돌아보게 됐된다지금도 오키나와에서 살아보기는 나의 버킷리스트 중의 하나다당장이 아니더라도언제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은 현재를 좀 더 충실하게 살도록 한다해보고 싶은 것만 다 해도 너무 짧은 것이 20대고 또 그것이 인생이라고 믿으니까.  





양주연
뭍보다 물이 편한 바다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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