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키나와 식도락 여행
요즘 들어 더욱 느끼는 건 나란 존재가 참 모순덩어리라는 점이다. 모든 것에 ‘그럴 수 있지’라는 관대한 태도를 견지하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되고 만다. 부지런하지만 게으르달까. 인연도 마찬가지여서 한 번 만난 사람도 소중히 생각하지만, 굳이 먼저 나서서 관계를 만들거나 이어나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고마운 인연도 있다. 고등학교 친구 S는 대학교 때 해외로 건너가 몇 년 전부터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내가 뉴욕에 가지 않는 한 만날 기회라곤 S가 한국에 들어오는 잠시뿐이라 1년에 두세 번 정도 보고, 그 밖엔 14시간의 시차를 뛰어넘어 SNS로 소통하는 게 전부다. 그래서 아쉽고, 만나면 더욱 반갑다.
여행은 없던 인연도 생기게 하지만, 있는 인연도 없앨 수 있는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여행을 함께 가는 건 별개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왠지 ‘아시아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말엔 흔쾌히 따라나서고 싶었다. 마침 여행이 고프기도 했고, S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단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번 기회에 오래된 친구인 S를 더욱 알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둘 다 좋아하는 일본, 그중에서도 오키나와로 떠났다. 그곳에선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섬도, 바다도, 일본도 처음이 아니었는데 처음 같았다. 심지어 비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에도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진짜로 처음인 것이 있다면 운전과 음식 정도였다. 제주도처럼 렌터카가 훨씬 편하다길래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아 난생처음 다른 나라에서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나라와 반대로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 더욱 겁이 났지만 한 번 적응하고 나니 특별히 어려울 건 없었다.
모순적인 인간답게 호기심은 많지만 낯선 재료와 음식엔 손을 잘 대지 않는다. 하지만 특이한 음식에 도전하는 걸 즐기는 S 덕에 난생처음 보는 오키나와 음식도 맛봤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다 포도다. 일본어로 우미부도(海ぶどう)라 불리는 해조류로, 생긴 게 정말 청포도와 똑 닮았다. 5분의 1로 축소된 듯한 청포도 알이 긴 줄기에 팔찌처럼 줄줄이 엮여 있다.
평소 김과 미역 외 해조류는 멀리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생기면 원체 잘 먹지 않지만, 바다포도는 오키나와 5대 해초인 만큼 반찬, 샐러드 등 다양한 요리에 들어있었다. 옆에서 맛있게 먹는 친구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고 포도송이 비슷한 것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알들이 톡톡 터지는 식감이 재밌을 뿐 특별한 맛은 없었다. 잼과 파이로도 만든다고 하는데, 직접 찾아 먹진 않겠지만 다음에는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주(일본어로 고야) 또한 실제로는 처음 본 식재료다. 6~8월 사이 더운 날씨에 나는 박과 식물로, 녹색 표면에 울퉁불퉁 돌기가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만화, 드라마, 영화에서 보고, 몸에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먹어볼 기회는 없었다. 오키나와 가정식에는 여러 재료를 섞어 볶은 찬푸르(ちゃんぷる)가 곧잘 오르는데, 여주, 두부, 햄을 넣은 고야찬푸르는 오리온 맥주에 곁들일 안주로도 손색이 없었다. 쌉쌀한 첫맛이 강렬하게 온 다음에는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만 남았다. 유난히 장벽이 없었던 건 오키나와 곳곳에서 눈에 띄는 고야 캐릭터에 친숙해진 덕분일지도 모르지만.
무엇이든 새로웠던 오키나와에는 아직도 얘기할 음식이 무궁무진하다. 돼지고기와 다시마조림을 얹은 소바, 돼지고기 샤부샤부, 부쿠부쿠 차, 갓 튀긴 가루비 감자칩, 자색고구마 과자, 블루실 아이스크림 등 눈앞에 아른거리는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이다. 오랜만에 자발적으로 떠난 오키나와 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 친한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 그리고 두툼한 뱃살을 덤으로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키나와 역시 바다에서 포도를 찾을 수 있는 모순적인 곳이었다. 모순적인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글, 사진 | 양슬아
‘먹고사는 일’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 반대로 맛없는 걸 먹을 때 유난히 화가 난다. 궁극적으로 매 끼니 주변에서 나는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든 정성스런 요리를 먹는 호사스런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