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과 릴랙스로 위로하다
눈 부신 태양은 나를 충전시키고 따사로운 햇볕은 나를 감싸 안는다. 야자수를 춤추게 하는 바람은 햇볕의 친구가 되어 옷깃에 부대낀다. 손을 쭉 하고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뭉게구름 가득하고 83번 2차선 도로는 하늘을 향하는 양탄자 같다. 목적지 없이 길 따라 하염없이 달린다. GPS가 알려주는 방향 따윈 중요하지 않다. 길을 좀 헤매면 어떤가. 시련을 겪어 무너진 마음조차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하와이의 자연과 함께라면 말이다.
마력을 지닌 하와이의 자연은 신의 축복 속에 있다. 어쩌면, 신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아닐까. 축복받은 자연 속 로컬들은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낀다. 천국이 따로 없다. 지구 상에서 ‘파라다이스’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몇몇 장소가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아니 영원히 내게 최고의 파라다이스는 하와이리라.
이곳 자연은 무척이나 풍부하다. 물밑에선 이름도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수많은 물고기가 살랑살랑 꼬리 치고, 물 위엔 바다의 힘을 온몸으로 맞서는 파도가 넘실거리고 그 위로 바다를 놀이터 삼은 이들의 로망이 물결처럼 밀려든다. 땅 밑의 숨소리는 그칠지 모르고 위염을 뽐내며 펠레의 기운을 묵묵히 전한다. 땅 위는 한국의 은행나무만큼이나 지척에 깔린 망고나무가 보는 이의 마음을 넉넉히 해준다. 가로수처럼 주렁주렁 달린 망고와 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진 작은 열매는 5월이 본격적인 망고의 수확 철임을 말해준다.
이곳저곳, 여기저기. 듬직하게 선 나무에 망고가 뒤덮었다. 볕을 많이 받는 쪽은 이미 태양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덜 익은 망고가 많지만, 하루가 멀다고 탐스럽게 영글어간다. 망고가 여러 개씩 달린 줄기는 그 무게가 버거운 듯 축축 쳐져 보인다. 그러다 ‘툭’하고 떨어질 모양이다. 사실 그때가 가장 맛있긴 하지만 잘 익은 망고가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로컬들이 주택을 매매할 때 대지 내 망고나무가 있으면 집값이 더 오른단다. 콘크리트 벽장 같은 아파트 단지, 학군 좋은 주거 단지의 가치가 오르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한국에선 여전히 비싼 수입 과일이지만(물론 제주도에서 재배를 시작해 결실을 보고 있다), 하와이에선 흔하디 흔한, 길거리를 걷다 신발 끝에 ‘툭’하고 차이기 쉬운 돌 같은 과일이다. 문득 누구나 쉽게 나눌 수 있는 축복과도 같은 생명이란 생각이 스친다. 길거리에 우뚝 선 망고나무가 내 것이 아니더라도 마치 내 것 같은 기분은 마음마저 부자로 만든다. 이런 풍성함을 느끼게 하는 건 망고뿐만은 아니다.
하와이 여행을 다닐 때 비상약처럼 챙기는 것이 바로 알로에 젤이다. 한국에서 딱히 사용할 일 없는 제품이라 여행 가방에서 빼지도 않는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브랜드 중 가장 좋다 하는 알로에 젤이라 피부가 뻘겋게 익곤 하면 며칠씩 자체 처방해준다. 하지만 이것도 자연이 만든 식물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셔츠도 뚫을 만큼 온몸으로 볕의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화산 하이킹을 하며, 흐르는 라바를 찾는데 정신이 빠진 나는 피부가 뜨거운 용암처럼 화상을 입은 걸 몰랐다. 선크림을 몇 번이나 덧발랐지만, 햇볕의 공격을 이겨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팔 한쪽이 새빨갛게 익었고 멈출 줄 모르는 따끔거림에 어찌할 바 몰랐다. 새 100마리가 부리로 쪼아대는 듯했다. 이미 내 팔은 내 것이 아닌 듯했고 얼음과 찬물의 도움으로 열기를 빼고 알로에 젤을 끊임없이 발랐지만, 결국 화상 연고에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2~3일 뒤 오아후에 도착해 항상 묵는 숙소에 갔다. 화상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가리려 칠 부 소매를 입었지만, 이미 화상으로 물들인 팔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라면 다 알 수 있는 상태다. 이를 본 숙소 사장님이 하던 일을 멈추고 집 뒤쪽 창고를 향했다. 거기엔 작은 알로에가 자라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한때 알로에 제품이 불티나게 팔렸던 때가 있다. 당시 알로에 효능을 알기에 너무 어렸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나는 20년이나 지나 똑똑하게 알로에 효능을 몸소 체험했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라는 어느 화장품 광고의 카피처럼 알로에즙을 마시는 대신 알려준 방법대로 피부에 바르고 또 발랐다. 끈적거림이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싸하게 시원한 느낌은 싫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알로에 예찬에 빠졌다. 붉은 기운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진정되었다. 군데군데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전날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땅의 기운을 한껏 품고 있는 알로에가 이리도 즉각적인 효과를 주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단, 3~4일 뒤 제 피부색에 가깝게 회복된 것을 보니 광고 카피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풍부한 자연이 인간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한다는 것이 이러한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또한, 풍부한 자연은 언제나 우리의 감정을 더 깊게 자아내는 보편적인 주제라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그렇게 축복받아 풍부한 자연은 힐링과 릴랙스로 우리를 위로한다.
글, 사진 | 박성혜
<오! 마이 하와이> 저자.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