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단둘이 떠난 여행
하와이에 있으면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것이 아쉽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하루하루 그리움에 사무친다. 임을 버리고 가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는데 ‘임’도 아닌 이역만리에 있는 땅이 그리워 이렇게 병이 날 줄이야. 그렇게 그리움이 밀물처럼 찾아올 때면 어김없이 항공권 예매 사이트를 기웃기웃한다. 항공사에서 하는 프로모션은 없는지, 항공권이 조금 더 저렴한 날은 며칠쯤인지 찾아보며 마음을 달랜다.
그때도 그랬다. 하와이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병이 도진 듯 또 항공권 검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시어머니와 여행 겸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일본행 티켓을 예약해뒀다. 주변 사람들은 시어머니와의 여행에 꽤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눈치가 보인다’니 ‘그게 어떻게 휴가니?’~ 등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결정적인 건 간과하고 있었던 일본의 여름 날씨였다. 출발 예정일이 7월 초였는데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동생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미쳤어. 그때 일본이 얼마나 덥고 습한지 아니? 근데 거길 누구랑 간다고!”
‘아… 이미 시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둔 터라 꽤 기대하고 있을 텐데. 이를 어쩐담’. 그날 저녁 남편과 상의를 했고, 그는 아주 쿨한 답을 했다. “그럼 하와이를 다녀와!” ‘하와이. 나는 좋은데 과연 어머니가 좋아하실까?’라는 고민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와이가 그립기도 했고, 내가 사랑하는 하와이. 하와이라면 누구든, 무엇이든, 언제든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와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 좋아. 하와이라면 뭐든 좋지! okay”
부랴부랴 항공권과 숙소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시어머니 일정상 일주일 정도 시간이 가능한 터라 5박 7일의 일정으로 계획했다. 그러던 중 한 줄기 무지개 같은 남편의 한 마디 “어머니랑 여행하면 제대로 쉬지도 못할 텐데, 어머니 먼저 들어오시고 며칠 더 쉬다 와!” 속으로 쾌조를 불렀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무심하게 대꾸를 했다. 하지만 나는 항공권을 변경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남편 배려 덕에 나는 며칠 더 지내다 오기로 했다.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 보다 더 많은 지인이 ‘거길 시어머니와 왜?’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시어머니와 여행을 갈 생각을 하는 나를 마치 효부상 후보에 오를 며느리처럼 대했다. 주변 반응과 상관없이 출발할 날짜는 어김없이 다가왔고 그렇게 난생처음 시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에 나섰다. 호놀룰루 공항은 여전히 날 반겼고 시어머니도 처음 보는 광경이 낯설었지만, 신기해하며 즐겼다. 늘 찾던 게스트하우스도 나의 편인지 투숙할 수 있는 방 하나가 비었다. 이성도 아니고 굳이 두 개의 방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아 한 방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퀸과 킹 사이즈 침대가 하나씩 있어 잠자리는 편하게 해결했다.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코스로 일정을 계획하고,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예약하고, 짧은 일정이지만 어머니의 입맛을 고려해 손맛 좋은 한식집도 몇 군데 알아뒀다.
도착 첫날 와이키키에서 선셋을 보며 시어머니께 하와이 홍보에 나섰다. 모르는 게 없는 똑똑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하는 것마냥 여행 내내 끊임없이 설명했다. 일정이 반쯤 지났을 때 헬기 투어에 나섰다. 어머니는 “비행기 타면 됐지, 헬기는 무슨 헬기야?”라고 손사래 쳤지만, “한국에서 언제 한 번 헬기를 타 보겠느냐?”라는 나의 설득에 긴장 반 설렘 반으로 헬기장에 도착했다. 헬기 투어는 균형을 맞춰야 하는 투어 특성상 몸무게 측정 후 자리를 지정한다. 보통 한 헬기에 6명이 탑승하는데, 일행이 아니더라도 지정해주는 자리에 탑승해야 한다. 헬기 탑승 시 자리의 중요성을 알던 터라 속으로 ‘좋은 자리를 주세요!’라고 바랐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온 나의 갸륵한 마음을 헬기 회사에서 알았는지 기장 옆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사실 기장 옆 좌석은 헬기 투어 시 가장 명당인 자리다. 앞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기에 투명한 창으로 시원하게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사진 찍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이다(함께 탑승한 이들은 본토에서 온 찰스 가족이었다. 엄마가 어린 아들딸 세 명을 타고 탑승하는 바람에 운 좋게 시어머니와 내가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헬기를 타고 긴장한 듯했다. 상공에서 헬기가 방향을 바꿀 때면 내 손을 꼭 잡았지만, 지금까지도 여행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그때를 떠올린다.
여행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운전에 가이드 역할까지.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았지만, 사실 매사에 신경이 쓰인 건 사실이다. 여행 마지막 날은 비치 투어에 나섰다. 어머니 연세에 물놀이를 좋아할까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처음엔 수영복만 입고 있는 걸 낯부끄러워했지만, 비치 내 다른 사람을 보며 여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여겼는지 금세 적응했다. 도시락 대신 사온 무스비도 꿀맛이라며 맛있게 드셨다. 잃어버릴만한 귀중품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며 고집하는 바람에 번갈아 가며 비치에 들어갔다. 비치까지 적극적으로 즐기는 모습에 모시고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 계주 시 바통 터치(Baton-Touch)를 하는 마냥 어머니와 자리를 바꿨다. 어머니는 비치로 향했고, 살짝살짝 발을 물 안으로 넣다 이내 물이 좀 차가웠는지 들어가지 못하고 모래사장에 철퍼덕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파도와 함께 춤추는 모래를 만지작만지작했다.
그 뒷모습을 멀리서 우두커니 바라봤다. 뛰어가서 비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지만, 순간 고부 사이가 아닌 한 여자로 느껴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없는 형편에 보탬이라도 되겠다고 꽃다운 나이에 6·25 전쟁 때 피난 온 이북 출신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고된 시집살이에 자식까지 가슴에 묻고, 남편 대신 가장으로 집안을 책임져온 그 세월의 무게가 양어깨에 짊어져 있는 듯했다. 분명 여행 내내 행복하다고, 좋다고 했는데 왜 뒷모습에서 세월의 고단함이 느껴졌던 것일까?
어머니는 꽤 오래 같은 자세로 바다를 즐겼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자신의 슬픔과 해묵은 상처를 씻어 냈을까?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내리는 고운 모래를 느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만약 ‘내가 먼저 달려가 고단했을 그녀의 삶을 포근히 감싸 안아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와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리라 여겼던 나는 그렇게 남편도 없이 어머니와 단둘만의 5박 7일을 보냈고, 여행 마지막 날 비치에서 그녀 인생의 무게를 살짝 느꼈다. ‘고부 사이’라는 관계를 잠시 내려놓고 ‘여자 vs 여자’로 느낀 카일루아 비치에서 보여준 어머니의 뒷모습은 아직도 내게 잔향처럼 남아있다. 저마다 주어진 인생의 무게는 있고 그 무게는 모두 다르다. 내가 함부로 어머니 인생의 무게를 평가할 순 없다. 하지만 남은 어깨엔 무겁게 짓눌린 고단함보다 어깨춤 들썩이는 가벼운 편안함이 드리어지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매우 불행한 삶이라 할지라도 태양이 빛나고 모래나 자갈 사이에 행복의 꽃이 피는 일도 있다.”라고. 어머니가 가진 꽃 중 한 송이가 하와이 여행이면 좋겠다. 이후에도 내가 꽃피울 수 있는 한 송이 꽃이 있다면 나는 주저앉고 어머니와 또 떠날 것이다. 하와이가 아니라 어디라도 말이다. 다시 하와이라면 더 좋고!
글, 사진 | 박성혜
<오! 마이 하와이> 저자,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