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또 다른 자연을 만든다
“정말이야? 진짜야?….”
깨톡. 사진 한 장으로 친구와 대화를 시작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성형외과의 비포 앤 애프터 사진 마냥, 마을의 전후를 비교한 사진이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다녀온 지 불과 서너 달 되지 않아 믿을 수 없었지만, 현실은 냉랭했다. 친구는 본인이 일 년 전 여행했을 때 찍어둔 사진까지 내게 보내며 재차 확인했다. “두 사진이 정말 같은 곳이라고!” 달라 보이지만, 안타깝게 두 사진은 같은 장소이다. “ㅇㅇ”이라고 답했다. 간단해 보이는 답이지만, 무거운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빅 아일랜드는 몇 달째 용암이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새로운 출구와 길을 만들며 땅을 넓혀가고 있다. 활화산이라 용암 활동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라바는 강물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폭죽이 터지는 듯한 용솟음과 불빛. 파편의 치솟음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툭툭 튀어 올랐다. 시뻘건 라바는 도로 위를 순식간에 집어삼켰고, 아스팔트 위로 용암이 울렁울렁 굳어 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일군 삶의 터전은 잿더미가 되었고 도로는 차단됐다. 방송국 기자는 눈코입을 다 가리는 군대 화생방 때나 착용할법한 마스크를 끼고 연신 카메라를 들이댔고, 당국 직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 파악에 나섰고, 현지인들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SNS로 중계하기 바빴다.
용암 분출 후 처음 며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원래 용암 활동이 있었고, 몰랐던 사실을 안 것도 아니니 호들갑 떨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저곳도 가봐야 하는데’ ‘라바 보트가 곧 재개되겠는데’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점점 언론의 과장 보도에 짜증이 났다. 앵커는 마치 하와이는 가면 안 될 곳처럼 멘트를 쏟아냈다. 심지어 지방의 작은 여행사는 빅 아일랜드 여행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러는 사이 꿀렁꿀렁 흐르던 라바는 땅끝에서 바다로 흘러들었고, 새벽 3~4시에 시작되는 라바 보트 투어는 기다렸다는 듯 재개했다. 예약 시작 불과 몇 분 만에 6개월 치가 매진되었다. 누군간 라바로 주저앉았지만, 또 다른 누군간 라바를 향해 일어섰다.
한 달 만에 피해지역은 점점 늘어났고, 몇몇 마을엔 깊이 60m 용암 웅덩이가 마치 싱크홀처럼 생겨났다. 지대가 낮은 마을로 내려오면서 균열되는 곳은 늘어났고, 무너져 타버린 집은 처음 4채에서 120여 채에 늘었다. 펠레의 신이 머무는 킬라우에아 화산의 분화구인 할레마우마우는 줄기차게 벌건 불덩어리로 일렁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푹’하고 꺼져버렸다. 그렇게 처음 폭발한 정상부의 분출이 줄어들고 점점 민가로 내려가면서 잠자코 있던 용암이 얼씨구나 하고 기운을 펴기 시작했고 이내 새길이 열렸다. 그 길은 파호아 마을로 이어졌고 용암은 마을을 뒤덮고 ‘카포호’ 지역으로 향했다. 마을을 삼킨 불길은 거침없이 카포호 베이를 향했다. SNS로 올라온 사진을 보니 누가 흑적색의 물감으로 거침없이, 시원하게 붓 짓을 해대는 듯했다.
빅 아일랜드 동쪽 끝에 있는 카포호 마을은 1960년 킬라우에아 화산 폭발로 이미 한 차례 소실된 적이 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처럼 그간의 시간은 상처를 씻어주는 듯했다. 주민들은 굳은 용암 위로 다시 터전을 만들었고, 아기자기 마을을 꾸몄다. 마을을 찾는 발걸음도 늘었다. 그런 이들을 위해 주민은 힘을 합쳤다. 마을 어귀에 주차장을 만들었고, 스폿으로 향하는 길목에 안내 스탬프도 하나하나 새겼다.
오솔길 같은 느낌의 길이 지루하지 않도록 길가에 선 나무에 달린 기분 좋은 문구는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담장의 장식품, 새소리, 고양이 인사, 숨바꼭질하는 개코의 재빠른 움직임은 이곳에서의 시간을 즐기게 했다. 그렇게 10~15분쯤 걸으면 카포호 타이드 풀(Kapoho Tide Pools)에 도착한다. 조수 웅덩이라고 부르는데, 밀물 때 찬 바닷물이 바위 웅덩이에 썰물 때 남은 것을 말한다. 파도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아 특이한 생물이 많고 수심이 낮아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스노클링을 즐기기 제격이다. 다른 장소들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조용하기도 하고(단, 그늘이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워낙 투명하고 깨끗해 물에 들어가지 않고 고개만 까-닥하고 떨구더라도 웅덩이 안 산호와 물고기들과 쉽게 인사할 수 있다.
기억 속에 붙잡아 두고 싶은, 외딴 숲 속 동화 마을 같은 곳, 이곳이 흘러내리는 라바에 쓸려갔다는 것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다. 많고 많은 길 중 왜 하필 다시 이곳일까. 누군가 손 쓸 겨를도 없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모습은 마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했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CG 같은 상황에 어안이 둥둥했고, 용암 웅덩이처럼 내 마음에도 구멍이 생긴 듯했다. 그렇게 마을은 신음 한 번 내지 못한 채 불길 속으로 사라졌고, 그 모습을 본 나는 흐느낄 수조차 없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자연의 법칙을 잘 안다. 지금 펼쳐지는 일이 어쩌면 자연 스스로가 그려가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재앙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땅의 호흡일 테고 나는 그걸 알지만, 인정하지 못하고 사진만 덩그러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길 뿐이다. 오솔길 같던 길, 하늘의 구름 점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내던 푸르른 웅덩이, 멀리서 베이를 향하던 하얀 파도를 대신해 검붉은 용암이 흘러내린 길, 갈라진 길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유황, 라바가 바다로 떨어지며 만든 하얀 연기 뒤에 감춘 가스. 몹시 다른 이 자연의 풍경을 마냥 경이롭다 하며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디 나 하나만 그럴까?
언젠가처럼 주민들은 다시 일어서서 힘을 모을 거다. 그러다 보면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의 평온이 찾아올 테고, 마을 입구에 놓여있던 우체통엔 좋은 소식이 날아오지 않을까? 마을 주차장 앞에 놓여있던 3$ 도네이션(donation) 상자가 다시 한번 더 놓인다면, 그땐 3$가 아닌 더 큰마음을 나누고 싶다. 그때가 꼭 오길 두 손 모아 기다려본다.
글, 사진 | 박성혜
<오! 마이 하와이> 저자,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에디터.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