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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아미 Aug 10. 2018

역경 끝에 찾아오는 천국

하와이의 보물, 라나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구름이 있으면 있는 대로, 햇빛이 비치면 비치는 대로 언제나 기분 좋은 하와이 날씨. 11월부터 4월까진 우기이지만, 비가 좀 내리는 것 말곤 특별히 나쁠 건 없다. 비가 내린다고 하더라도 곧 무지개가 방긋 인사 건넬 테니 이 또한 기분 좋은 설렘이다. 7~8월 태풍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 않고, 태풍이 오면 오는 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을 찾으면 된다. 그래서 내겐 1년 언제든 늘 좋은 하와이다.







우기가 끝나는 3월은 하와이 속 글루밍이라는 새로운 날씨가 있고 4월은 하늘이 열리기 시작하고 5월은 온통 싱그러움을 머금고 6월은 여름의 시작을 느낄 수 있고 7월은 땀 한 방울 식혀주는 바람이 더 반갑고 8월은 태평양 바다를 수영장처럼 즐기기 제격이고 9월은 왠지 여름을 한 달 더 누리는 듯하고 10월은 커피콩의 진한 향기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11월은 블랙프라이데이 덕분에 쇼핑 싫어하는 사람도 쇼핑 즐기기 제격이고 12월은 이색적인 블루 크리스마스가 있다. 매서운 칼바람 뒤로하고 떠나면 1월의 따스함이 포근히 감싸 안는다. 그렇게 늘 하와인 언제 가도 자연이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향연에 기뻐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 곳이다.








그때도 그랬다. 지인과 함께 떠나는 길, 우린 매우 흥분되어 있었고 함께할 수 있는 여행을 자축하느라 바빴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호들갑 떠느라 정신없었고, 들떠 있던 사이 지인은 내게 우리의 첫 여행을 기념하는 엽서를 만들어 줬다. 즐거워하는 우리를 빨리 하와이에 데려다주고 싶었는지 바람도 그날따라 도왔다. 평소 인천-호놀룰루까지 7시간 정도는 소요되는 데 출발이 20여 분 지연되고도, 6시간 만에 도착했으니 바람이 큰 도움을 준 것 아닌가! 



호놀룰루에 도착해 이웃섬인 라나이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지인들과 며칠 뒤 다시 만나기로 하고 라나이행 탑승 수속까지 마쳤다. ‘포시즌스 라나이 리조트(Four Seasons Resort Lanai)’를 이용할 계획이라 부푼 기대감에 구름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리조트는 호놀룰루 공항 내 전용 라운지를 운영하고 있어 그곳에서 미리 체크인을 마쳤다. 한쪽에 정갈하게 마련된 다과 역시 리조트의 이미지를 대신하는 듯 심플하지만, 럭셔리 그 자체였다. 북적이는 게이트 앞 대기가 아니라 조용하게 휴식을 취하며 라운지를 즐기다 보니 탑승 시간을 앞두고 있어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탑승 시간이 되었지만 특별한 안내 방송이 없어 몇 분 지체되는 모양이다 여기며 남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20분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탑승객들이 하나둘 탑승구 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누구 하나 화내는 사람 없이 웃는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는 60여 명의 사람을 보니 반은 현지인이고 나머지는 나와 같은 여행객이다. 40~50분쯤 더 지나 탑승을 시작한다는 반가운 멘트와 함께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항공권을 읽는 리더기의 ‘삐-’하는 소리가 이리도 경쾌하게 들리다니!




시차와 비행에 피곤이 조금씩 몰려왔지만, 부푼 기대감은 피곤마저 무색케 했다. 좌석에 앉아 어서 빨리 이 비행기가 날아올랐으면 했다. 묵직한 바퀴는 활주로를 따라 움직이다 갑자기 멈췄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모두 침묵으로 기다렸다. 정적이 흘렀고 비행기는 처음 있던 게이트로 방향을 틀었다. 기내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되었고 이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내렸고 그렇게 다시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았다. 몇몇 승객이 이유를 물었다. 다행히 기체 결함은 아니다. 짜증을 낸다고 해서 빨리 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기다렸다. 뭐, 이 정도 기다림은 참을 수 있다.(라나이를 가는데!) 함께 있던 승객 중 누구 하나도 짜증 내지 않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다.








오후 1:05분 출발이던 항공편의 게이트는 3시가 되어 다시 열렸고 모두 탑승을 마쳤다. 비행기는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꽤 오래 이동해 활주로 끝까지 간 후 잠시 멈춰 관제탑의 신호를 기다렸다. 앗싸! 이제 정말 가나보다 하는 생각에 맞춰 프로펠러는 신나게 돌며 이륙을 준비했다. ‘자자. 가자!’라며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프로펠러의 힘찬 날갯짓은 또 한 번 허공으로 날아갔다. 라나이 섬에 폭우와 강풍으로 이륙 허가가 나지 않은 것. 결국 활주로 위에서 허망하게 시간을 보낸 비행기는 다시 게이트로 돌아왔다. 속으로 ‘내리라고만 하지 말아 줘. 제발’이라고 외쳤지만, 어디 이런 순간 내 마음대로 될 리가 있나! 결국 또다시 내렸다.


직원은 죄송하단 말 대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승객들은 조금 번거로운 듯 궁시렁거렸지만, 평화롭기 그지없다. 한 아이가 아빠에게 ‘왜 집에 안 가?’하고 재촉하며 물었지만,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것이고, 아빠라고 뭘 특별히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두 번 비행이 취소되다 보니 게이트 앞 승객은 늘어났다. 다음 비행기 편을 예약한 탑승객까지 몰리게 된 것.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건 딱히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 호놀룰루 여행을 시작한 지인에게 ‘잘 도착했냐?’라는 문자가 왔지만, 답하지 않았다. 멋진 라나이 풍경으로 답해주고 싶었다. 두 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 시계는 5시를 훌쩍 넘겼고 공항 창 너머로 일몰의 기운이 공항을 서서히 물들이고 있다. 호놀룰루공항에 도착해 끼니라곤 한 끼도 못 먹은 상황이었지만, 탑승 안내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 49번 게이트 앞에서 꼼짝달싹할 수밖에 없다. 다시 탑승하라는 방송이 나왔고 배고픔 때문인지, 빨리 라나이에 가고 싶은 마음인지 하여튼 급해진 마음 탓에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줄까지 섰다.




세 번째 탑승하며 ‘한 번이라도 좀 뜨자’하는 마음은 간절해졌다. 이내 마음이 기장에게까지 닿았는지, 아니면 하늘이 알았는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와 진동이 기내에 울리기 시작했다. 두뚜둥 우-윙 하고 날아오르자 탑승객이 모두 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배고픔도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게 승객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기내를 가득 메웠다. 고단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라나이는 오아후와 꽤 가까운 섬이지만 마음 때문인지 꽤 오래 잠든 듯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움직였다. 눈을 슬쩍 떠 창문 아래로 보니 아주 작은 섬 라나이가 눈에 들어왔다. ‘앗싸! 이제 곧 도착하겠군.’ 안심하며 호텔에 도착하면 무엇부터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비행기가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건 몇 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행객들은 나처럼 라나이와 마주할 생각에 여전히 들떠 있었다. 모두의 기대를 깬 건 “강한 바람 탓에 착륙 허가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었다. 조금 있음 도착이겠군, 무엇을 먹지라는 행복한 고민은 곧 산산이 조각났다. 비행기는 라나이 섬 상공을 뺑뺑 맴돌다 결국 호놀룰루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그날 라나이행 항공편의 운행이 모두 끝났다. 여행객은 둘째치고 현지 주민들이 있으니 특별 편 같은 운행이 있을 거라 찰떡같이 믿었다.




배고픔이 물밀 듯이 밀려와 참을 수 없어 공항 내 식당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불안한 마음에 식당에서 편하게 앉아 먹을 수가 없어 포장해 게이트 앞에서 허둥지둥 먹는데 리조트 직원이 날 찾았다. “오늘 비행은 더 없을 것 같아. 하룻밤 어디 가서 잘 곳 있어?” 오마이갓드! 평소 자주 가던 숙소 오빠에게 연락하니 방이 하나 남았으니 얼른 오란다. 리조트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항공편을 변경했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어둠이 깔린 공항을 다시 찾았다. 어제와 같은 역경은 다시없겠지? 종일 같이 있었던 탑승객 중 일부가 같은 비행기를 타는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늘 날씨는 좋은데!”라며 날씨 인사로 하루를 열었고, 그렇게 라나이에 발을 내디뎠다.








공항에 도착하니 리조트에서 픽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새벽,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을법한 이차선 도로에 일렬로 높게 솟은 쿡 소나무의 환영을 받으며 라나이와 상봉했다. 하와이 섬 중 가장 작지만 가장 럭셔리한 섬 라나이, 역경 끝에 나는 포시즌스 라나이 리조트에 입성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어제는 정말 우리도 놀랬어!”라는 체크인 직원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사실 오는 과정보다 비행기 타고 내리고 반복하는 게 더 힘들었어”라고. 객실에 도착한 나는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속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다. 신의 딸 에아가 바깥세상에 나와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넨 말.


 천국은 여기예요.







인천공항 출발에서부터 30여 시간. 그렇게 나는 잊을 수 없는, 눈 감으면 떠오르는 궁극의 파라다이스를 만났다. 언제나 좋은 하와이지만, 2월의 하와이는 내게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귀한 건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글, 사진 | 박성혜


<오! 마이 하와이> 저자, 사보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에디터. 꿈꾸지도 않았던 여행지, 하와이에서 사랑에 빠졌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여행하는 법을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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