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니요

돈과 여행의 상관관계

by 홍아미

동남아시아 여행에 처음 입문하는 친구들에게 첫 여행지로 늘 추천하는 도시는 역시 방콕이다. 나의 첫 동남아 여행지이기도 하지만, 이곳만큼 동남아 여행의 매력을 응축해 놓은 곳도 없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 세계에서 모여든 젊은 배낭여행자들의 에너지, 맛있고 저렴한 음식, 다양한 액티비티, 트렌디한 맛집과 숍, 강남 못지않은 화려한 쇼핑몰까지 그야말로 놀고 먹고 즐기기 위한 모든 것이 다 준비된 도시라 할 수 있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글쎄. 방콕은 그야말로 돈으로 살 수 있는 천국이다. 다만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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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휴가로 남편과 오랜만에 방콕에 갔다. 내게는 네 번째 방콕행이라 관광보다는 휴식의 목적이 더 컸다. 고급 호텔 하나 잡아서 낮에는 근처 맛집이나 마사지숍 위주로 돌아다니고, 호텔 수영장에서 릴렉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 되어서야 외출을 했다.

첫날엔 무조건 카오산로드다. 동남아시아 여행지의 핵심이 방콕에 응축되어있다면 카오산로드는 그 심벌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가면 세계 젊은이들의 펄펄 뛰는 기운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하면 좀 오버인가. 적어도 내게는 그런 곳이다. 스물한살 때 처음 카오산로드에 도착했을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카오산로드는 젊디젊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다. 그때는 진짜 가난한 배낭여행자여서 선택의 여지없이 카오산로드 근처의 최저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길거리 음식으로 세끼를 때웠다면, 지금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이지. 그만큼 나이가 든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옛날의 내 모습을 기억할리 없는 누군가에게 ‘야 나 이만큼 컸어!’ 괜히 의기양양한 기분도 들고.

어쨌든 여전히 젊고 자유분방한 카오산로드는 다시 나를 스무살 젊은 시절로 돌려놓는 마법 같은 역할을 한다. 클럽에서는 DJ들이 강렬한 비트의 음악을 뿜뿜 쏟아내고, 삐끼들은 어쩜 몇 년전보다 한국말이 더 유창해졌는지! 쇼핑한 물건을 가리키며 “누나 그거 얼마에 샀어? 나 더 싸게 해줄 수 있는데” 순간 남대문에 온 줄.

태국 하면, 마사지잖아! 1시간에 250바트(8천원) 짜리 타이마사지를 받는다. 넓은 실내에 더러운 매트가 쪼로록 깔려 있고, 모르는 외국인들과 함께 신음소리를 내며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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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보이는 길거리 음식은 왜 이리 많은 건지. 시원한 땡모반 한 잔에 50바트짜리 팟타이 한 그릇 흡입. 후식으로 바나나 로띠도 빼놓을 수 없다. 바나나와 연유만으로도 충분히 달콤하므로 다른 토핑은 추가하지 않는 게 더 맛나다.

노천바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이미 배가 너무 불러서 엄두가 안났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길거리 헤어숍. 레게머리 한 줄 땋아주는데 50바트(1500원)이란다. 처음이라 일단 일부만 시도해보기로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 실을 선택했다. 5줄을 땋는데 익숙한 손놀림으로 20분여 만에 끝.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렇게 몇 시간을 원없이 놀았다. 호객하는 뚝뚝 기사와 적당한 가격에 흥정을 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캬, 이 속도감은 너무 짜릿하다. 발을 구르며 신나 하니 같은 방향을 달리던 옆 뚝뚝의 서양인 가족이 나를 보고 웃으며 따라 한다. 아, 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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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돌아와 업된 기분을 가라앉히며 포근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아, 너무 재밌었다! 오늘 우리 얼마 썼지?” 남편이 얼추 계산해 내놓은 금액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쇼핑하고, 먹고, 마시고, 마사지 받고, 머리도 하고..... 둘이서 그렇게 흥청망청(?) 놀고먹는 데 고작 3만 6천원 들었다고? 우리가 이렇게 즐겁고 신나는데 드는 돈이 삼 만원이라니. 세상에 외치고 싶었다. 아니, 여러분 왜 방콕 안 와요? 행복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니깐요.




최고의 여행을 완성하는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날씨운도 따라줘야 하고, 숙소도 마음에 들어야 하고, 동행자와의 합도 중요하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하면 여행 만족도에 돈이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예산이 넉넉하면 여행을 하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불쾌한 상황을 상쇄할 여력이 생긴다. 반대로 없는 돈을 쪼개 하는 여행이라면 마음의 여유가 상대적으로 없다. 사소한 금액의 바가지에도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작은 돈을 아끼기 위해 시간을 더 쓰게 된다. 물가가 비싼 나라에 가면 괜히 기가 죽기도 하는데, ‘즐기러’ 온 여행자의 본령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누구 못지않은 짠순이로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느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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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엄마 회갑여행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 여행의 목적은 엄마 회갑 선물이었으므로 나는 이제껏 한 여행 중에서 가장 돈에 관대해진 상태였다. 한 끼에 2~3만원 하는 식사는 보통이었고, 숙소는 최소 3성급 이상이었다.

하루는 베네치아의 명물인 곤돌라를 타보기로 했다. 알아보니 인당 가격이 아니라 배 한 대당으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바가지를 막기 위해서인지 정가제를 도입하고 있었는데 30분에 80유로 정도였다. 고작 30분에 10만원은 좀 비싸다 싶어 망설이는데, 문득 인터넷 유럽여행사이트에 곤돌라 동행을 구하는 글이 자주 올라오던 게 생각났다. 나의 짠순이 기질이 죽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오후에 곤돌라 함께 타실 분! 2명 자리 있어요!”

운 좋게도 바로 동행을 구할 수 있었다. 리알토 다리 근처에서 접선하기로 하고 만나보니 이십대 초중반이나 되었을까 어려보이는 남녀학생들이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적당한 곤돌라리에를 찾으러 함께 걸어 다녔다. 운하 근처에는 줄무늬 옷을 입은 뱃사공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처음 마주친 뱃사공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책정된 80유로를 불렀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여학생은 조금 깎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뱃사공은 인원수가 적은 것도 아니고 6명 정원이 다 찬 상태에서는 조금도 할인해줄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냥 타죠. 얼마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엄마를 옆에 두고 흥정하느라 시간 낭비하는 게 싫었던 나는 일단 타자고 얘기했다. 작은 배에 옹기종기 여섯명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콧수염이 멋진 뱃사공은 목청 높여 칸초네를 부르며 좁은 운하 사이사이를 노저어갔다. 돌다리 위를 건너가던 베네치아 시민이 그 자리에 서서 화음을 보태는데 오페라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듯 신기하기만 했다. 웃으며 행복해하는 학생들의 표정을 보니 문득 어린 시절 나의 첫 유럽배낭여행이 떠올랐다.

돈이 없어서 하루 종일 딱딱한 바게트 샌드위치 하나로 버티기도 하고, 루브르박물관이나 몽생미쉘같은 유명한 명소까지 기껏 가서도 비싼 입장료에 간이 작아져 그대로 되돌아 나와야 했던 기억. 그 때 단돈 만원이 얼마나 큰돈이었던가. 아끼고 아껴 바게트 대신 사먹었던 크루아상은 또 얼마나 맛났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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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의 황홀한 시간이 끝나고 80유로를 걷어서 뱃사공에게 건네줄 시간, 나는 말했다.

“10유로씩만 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할게요.”

다들 10유로를 손에 들고 이거 그래도 되나...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차피 우리 둘이 탔으면 10만원 썼을 텐데 덕분에 싸게 잘 탔어요. 고마워서 그래요.”

지갑에서 40유로를 꺼내 보태서 뱃사공에게 주자 “You are a good person.”이라며 엄지를 척 들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 하세요!” 낯선 도시에서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출이 많았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돈을 아껴서 얻은 행복과 돈을 쓰고 얻은 행복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걸까.

배를 타기 전 몇 유로라도 깎고 싶어 하던 여학생의 심정을 나는 잘 알았다. 여행하다보면 가끔씩 만나는 행운, 누군가의 호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단 한 명의 호의가 도시 전체의 호의로 느껴지기도 하니까. 어쨌든 그 대학생들은 10유로로 곤돌라를 타는 행운을 얻었고, 삼십대 후반이 되어서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된 나는 그런 행운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을 얻었으니 된 것 아닌가.








글, 사진 |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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