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여름

여행으로 삶이 바뀐 사람들에 대하여

by 홍아미


미친 듯한 더위가 아침부터 밤까지 괴롭히고 있는 요즘이다. 돌 맞을 소리인가 싶지만 그래도 나는 여름이 참 좋다. 눈부시다 못해 강렬한 햇빛, 그 사이로 불어오는 미풍, 시원하게 쏟아붓는 비, 언제든 뛰어들고 싶은 바다. 좋은 것 투성이인 나의 여름, 그리고 이번 여름에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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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평범한 바다가 아니다. 파랑 중에서도 가장 고운 파란 입자들만으로 찰랑거리는 투명한 바다. 희고 부드러운 백사장. 햇빛은 따사롭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한다. 아, 여름의 바다는 천국이다.

여행작가 친구들과 휴가를 맞춰 제주도 김녕 성세기 해변에 놀러 갔다. 내가 바다를 이토록 좋아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수영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부터였을 거다. 나보다 며칠 앞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친구들의 독촉으로 도착하자마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에 나갔다. 적당한 수온, 환상적인 날씨. 그것만으로도 내 기분은 최고 지점을 넘어섰다.

“여긴 너무 얕아서 안 되겠어.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수영하자.”

J언니의 제안에 방파제 옆 3~4M 수심으로 보이는 깊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거기에서 노는 무리들이 있었다. 햇볕에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 탄탄하고 옹골찬 근육 위로 맑은 바닷물이 맺혀 있었다. 방파제 위에서 다이빙을 하고, 패들보드를 타며 유유자적 노는 모습은 한량에 다름 아니었으나 그들의 모습이 왠지 좋아 보였다. 알고 보니 ‘김녕회관’이라는 펍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과 스태프들이었다. 부산에서 평범하게 일하던 직업을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 자릴 잡은 지 2~3년 차 되었다고 했다. 비교적 최근에 내려와 형들의 일을 도와주면서 가게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M과 친해졌다.

“부산에 있을 때는 돈 버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어요. 아침엔 수영강사로 일하고 오후엔 PT일도 하고, 돈 많이 벌어서 빨리 자리 잡고 결혼하고……. 그게 유일한 인생 목표였다니까요. 그런데 형이 보내준 제주도 바다 사진 보니까 와, 내가 이 좋은 데 두고 왜 불행하게 살고 있는 거지 싶은 거예요. 내려와 보니까 너무 좋아요.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아도 모자란 인생이잖아요.”

회관 일을 마친 이들과 밤에는 맥주까지 사들고 또 밤바다를 보겠다며 방파제에 올라갔다. 음악을 틀어놓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홀짝이는 맛. 눈을 감았다 뜨면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황홀한 밤. 피가 절절 끓는 청년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 앞에서 결국 웃통을 벗어던지고 뛰어들었다. 어둠 속에서도 행복해할 수 있다니, 그보다 더한 행복이 세상에 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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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바다에서 3일 내내 김녕회관 친구들과 수영하고, 서핑하고, 스노클링 하며 노느라 이미 내 피부는 노릇노릇 잘 구워진 빛깔이 되었지만, 이번 여름 내겐 꽤 큰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따는 것.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 며칠 후 나는 태국으로 떠났다. 방콕에서 남편과 3박 4일의 여유로운 여행이 끝나고 나는 홀로 푸켓으로 향했다. 오픈워터와 어드벤스드 자격증을 한 번에 따는 게 목표였다.

한국에서 이미 예약해둔 ‘토닉탱크’라는 한국업체를 찾아갔다. 산과 사라, 부부가 운영하는 현지 다이빙숍이었는데, 비수기인 탓에 학생이 나밖에 없는 관계로 일대일 맞춤 강습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푸른 바다는 사실 세계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왕 물속 세계를 탐험할 거면 아름다운 바다에서 경험하고 싶었다. 이미 이름난 관광지인 탓에 물가가 비싸긴 했으나 푸켓을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기도. 첫날의 이론 강습 후 둘째 날에는 보트를 타고 라차야이섬까지 나갔다. 수트를 입고 장비를 착용하니 제대로 걷고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바다에 풍덩, 하고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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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구 상에서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환상적인 방법은 바로 바닷속에 있었다. 신발 대신 핀을 착용한 두 다리는 부드럽게 물속을 휘저으며 추진력을 만들어냈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위로 들면 둥실 몸이 위로 떴다. 반대로 아래로 가고 싶으면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위로 들면 되었다. 조금 적응하니 몸이 자유자재로 물속을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수천 마리 물고기 떼와 같은 속도로 유영하는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랬다. 나는 다이빙 체질인 것이었던 것이다!

‘준비된 다이버가 왔다!’며 산 선생님이 폭풍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경력 18년 차의 베테랑 다이버인 그는 스쿠버다이빙이 얼마나 안전 지향적이고 체계적인 스포츠인지 잘 가르쳐주었다. 그의 이야기 또한 참 매력적이었다. 제주도의 한 호텔에서 근무하던 젊은 호텔리어, 휴가차 푸껫에 갔다가 다이빙을 처음 접해본 그는 인생이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또라이 소리 들었어요. 푸켓에서 전화로 사직서를 냈으니까. 하하. 지금 생각하면 참 미친 짓인 것 같은데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가족으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다이빙을 선택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3년 전에는 제자였던 사라 선생님과 사랑에 빠져 지금은 부부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신이 살고 싶은 곳을 스스로 선택해 삶을 꾸려가고 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요. 난 왜 내가 태어난 한국에서 살지 못할까. 그런 팔자도 있나 보다.”

외국생활이 벌써 18년 차에 접어드는 그이지만 여전히 한국말을 더 많이 쓰고, 한국 방송을 보고, 한국 인터넷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이건 무슨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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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여행의 순간들 가운데, 내 삶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무언가’를 포착하고 강력하게 잡아챌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누군가에게는 한낱 ‘한여름 밤의 꿈’으로 흩어져버릴 행복의 순간을 어떻게 하면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 실체가 있는 것으로 빚어낼 수 있단 말인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차근차근 순서대로 단계를 밟아 올라가지 않아도, 그저 본능적으로 ‘저것은 나의 삶이다’라고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눈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환상을 자신의 인생으로 만드는 사람들, 그러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분명히 있지만 적어도 내가 본 그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선택 이후에도, 엄청난 변화를 받아들인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있고, 그것은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 환상을 꺼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면,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니 후회하거나 불평해선 안 될 일이다.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이제 투명한 바다는 나의 SNS 안에서나 빛날 뿐, 숨 막히는 더위와 매연 가득한 도시에서의 하루가 계속되겠지.

작은 한숨.

그러나 이 역시 불평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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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홍아미

여행 에세이스트. <지금, 우리, 남미> 저자. 20살 홀로 떠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25개국 100여 개 도시를 누빈 중증의 여행중독자, 라고 하지만 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하는 30대 여자입니다. 거창한 세계일주도, 럭셔리 여행도 아닌, 그저 일상 속에 내가 원하는 여행을 녹이는 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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