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씀씀에서 보낸 두 달간의 후기를 부탁받은 지 거의 한 달이 됐다. 흔쾌히 응했고 금방 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흘러나오는 대로 손가락을 놀렸더니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 구구절절했다. 고쳐 봐도 구질구질했다. 정말 창피해서 이딴 걸 세상에 내놓을 바에야 지각생이 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구구절절한 사람이다. 젠체해봤자 티가 날 것이다. 그리고 씀씀에서는 왠지 좀 구구절절하게 굴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슬프게도 시간 질질 끈다고 좋은 글 나오는 거 아니다.
나는 평범한 이십대 후반 백수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다가 위산에 타죽을 것 같아서 때려치우고 장편 소설을 썼다. 다시 취업 준비에 뛰어들기 전, 작품을 퇴고해 공모전에 도전했다. 씀씀에서. 올해 늦봄과 초여름을 씀씀에서 보냈다. 작업실 앞마당의 라일락이 피었다 지고 장미가 만발하는 동안 부지런히 합정동을 드나들었다.
여기까지 써놓고 또 ‘내 글이 제일 구려 병’에 걸려서 바닥을 뒹굴다가 돌아왔다. 내가 멋있을 수 없을 땐 멋있는 사람의 멋있는 말을 인용하면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여성의 창작에는 일정한 수입과 자물쇠가 딸린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씀씀에도 자물쇠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현관문에 달린 튼튼한 보안장치고, 하나는 심리적 보안이다.
우리는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남성 서사를 배우며 자랐다. 남성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의 역할과 성격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여성의 창작물에 대해서는, 요즘에야 안 그런다지만 ‘여류’딱지가 붙는다. 주류와는 별개 취급하겠다는 뜻이다. 나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 서사를 쓰고 싶다. 독자들에게 독선적인 고집쟁이에 좀 찌질하고 유치한 구석도 있는 십대 여자애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여자애가 주인공으로서 승리하는 이야기를 내놓고 싶었다. 찌질한 남자 주인공의 승리는 세상에 넘쳐나니까.
이런 얘기는 남성 창작자와는 결코 편하게 나눌 수 없다. 왜 그런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그래서 작업실을 찾을 때 여성 전용 공간이길 바랐다. 내가 왜 위와 같은 생각을 품고 고집쟁이 여자애를 고집스럽게 품고 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길 바랐다. 씀씀이 그랬다. 창작하는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안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씀씀에는 ‘언니들’이 있었다. 닫은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타자 소리와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이따금 터지는 웃음소리에도 소속감을 느꼈다.
실용적인 얘기도 좀 해보겠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정한 수입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는 한 푼 한 푼이 소중한 백수다. 그래서 손을 떨면서 예쁜 잡동사니를 구입하곤 한다. 꼭 필요한 물건을 살 때도 손은 떨린다. 그러나 작업실 월 회원권만큼은 2018년 최고의 지출이었다고 자부한다.
집에 있었다면 굴러다니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씻고 깨끗한 옷을 입고 버스를 타고 강을 건너 합정으로 간다. 손을 씻고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내려온다. 일단 앉으면 몇 줄이라도 쓰게 된다. 잘 풀리지 않을 땐 옥상 벤치에 누워있거나 산책을 할 수도 있다. 작업실 문을 닫고 나오면 근처는 조용한 주택가고, 큰길을 건너 조금 걸으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번화가가 있다. 맛있는 빵집도 있다. 혼자 있을 땐 그 곳에서 저녁빵을 가끔 사먹었다. 마당 채소를 뜯어 샐러드를 해먹기도 했다. 집에 루꼴라 화분을 키우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는 맛이었다. 언니들이 작업실이 있는 날엔 냉장고 속 재료를 털어 차린 식탁에 아미 언니 표현대로 ‘숟가락을 얹었다’.
어떤 날은 집중이 잘 됐다. 영 말썽이던 인물에게 새 역할을 쥐어주고도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졌던 날의 기쁨이 기억난다. 집중이 잘 안 되는 날은 대부분 내가 말썽이었다. 빈둥거리며 딴 짓을 하다가도 날이 어두워지면 정신을 차리고 타자를 쳤다. ‘오늘 진짜 진도 안 나갔다’고 투덜거리며 귀가 버스를 타는 날도 있었다. 그건 분량이 욕심껏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지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단 뜻은 아니었다. 씀씀에서 보낸 두 달은 최근 두 달보다 농후했다.
당선이 되고 출간이 된다면 작가의 말 감사 명단에 씀씀을 적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상금(과 당선의 영예)은 다른 사람의 몫이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적어야겠다. 나는 씀씀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용기를 얻었다. 씀씀이 당신에게도 그런 공간이길 바란다.
+ 빼놓으면 섭섭한 얘기가 하나 더 있다. 씀씀 언니들은 갑자기 프리마켓을 열겠다고 했다. 살면서 많은 즉흥 계획들에 휩쓸렸지만 대부분 제대로 부풀기도 전에 김이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그토록 착착 진행되는 계획은 처음 봤다. 언니들은 날짜를 정하고 사람을 모으고 포스터를 만들어 마켓을 홍보했다. 마켓은 성공적으로 열렸다. 말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씨 좋은 일요일에. 머릿속 계획을 현실로 일궈내는 그 추진력이 얼마나 감동스러웠는지 다들 알아야 한다.
글쓴이: YJ
"작업실에서 두 달간 함께 생활했던 Y에게 함께 생활하면서 어땠는지 몇 줄 써달라 부탁했다. 그 부탁을 한 것도 잊을 때쯤, '어,언니... 그 때 부탁하신 거 쓰고 있는데요... 계속 수정하다보니 끝이 안 나요 ㅠㅠ" 가끔 어린 친구들에게 농담 같은 진담을 던지곤 한다. Y는 너무 진지해서 가끔은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그 진정성이 정말 아름다워서 어떨 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글도 그랬다. 진지하고 솔직하게 적어준 그 아이의 짧은 에세이에 마음이 녹는다. 설레발 치기 좋아하고 가벼운 언니들이라 가끔 미안했는데, 더 그래도 될 거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하하."-홍아미 덧붙임
**씀씀작업실은?
합정동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한 여성전용작업실. 여행작가, 기획자, 글쓰기강사 등 다양한 여성창작자들이 모여 일도 하고 작당모의도 합니다. 현재 작업실 멤버를 구인하고 있어요! 다양한 소식을 받고 싶으시면 카카오톡 플러스친구 ‘씀씀’을 등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