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큐 보고 펑펑 운 40대 아줌마

by 코난의 서재

"엄마, 하이큐 진짜 안 볼 거야? 후회한다?"

고등학생 아들이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태블릿을 보며 물었다. 배구. 고등학교 배구부 이야기라고? 스포츠 만화에는 1도 관심이 없었다. 슬램덩크 세대였지만 정작 나는 농구에 큰 감흥이 없었고, 운동이라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억지로 한 게 전부였다. 배구라니. 그냥 공 넘기고 받는 거 아닌가.

"됐어. 난 명탐정 코난이나 볼게."

그렇게 단칼에 거절했던 게 불과 두 달 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코난을 정주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튜브 알고리즘이 바뀌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관련 영상들이 추천에 뜨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하이큐 명장면 모음'이라는 썸네일이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 머리의 작은 소년이 높이 점프하는 장면이었다. 별생각 없이 클릭했다.

고작 3분짜리 편집 영상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뭐지, 이 느낌은.

그날 밤, 결국 넷플릭스를 켰다. '하이큐!!' 시즌 1, 1화. "그냥 1화만 보고 잘게." 매번 그랬듯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했다.


새벽 3시. 어느새 8화를 보고 있었다.

주인공 히나타 쇼요는 키가 162.8센티미터다. 배구라는 스포츠에서 이 숫자가 얼마나 불리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녀석, 포기를 모른다.

초등학교 때 TV에서 우연히 본 장면 하나가 이 소년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전국대회에 출전한 카라스노 고교, 그중에서도 유난히 작은 선수 하나가 거인들 사이에서 마치 날아오르듯 점프하는 모습. 사람들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불렀다. 히나타는 그 순간 배구에 미쳐버렸다.

문제는 히나타가 다니는 중학교에 남자 배구부가 없었다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이 녀석, 직접 만들었다. 혼자서. 3년 동안 혼자 연습하다가 겨우겨우 부원을 모아서 첫 공식 대회에 나갔다. 그리고 1회전에서 처참하게 박살났다.

상대는 '코트 위의 제왕'이라 불리는 천재 세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있는 키타가와 제1중학교. 점수 차이가 얼마나 났는지는 차마 말하기도 민망하다. 경기가 끝나고 히나타는 코트 위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 녀석이 카게야마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다음에는 내가 이긴다."

코트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상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내뱉는 그 한마디. 47세인 내가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25년 전, 대치동에 처음 학원을 열었을 때가 떠올랐다. 경력도, 인맥도, 자본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나는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뿐이었다. 첫 달 등록 학생 수, 고작 3명. 월세 내기도 빠듯했다. 주변에서는 "대치동에서 그렇게 쉽게 되겠어?" "경력부터 쌓고 와"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더라.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두고 봐. 내가 해낸다.'

히나타가 카게야마를 올려다보던 그 눈빛이, 25년 전 내 눈빛과 겹쳤다. 작고, 초라하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포기만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그 눈빛.

히나타는 카라스노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작은 거인'이 뛰었던 바로 그 학교다. 배구부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거기 누가 있었겠나. 카게야마 토비오. 중학교 때 자신을 박살 냈던 바로 그 녀석이 같은 학교 배구부에 들어와 있었다.


이 둘의 첫 만남 장면에서 나는 빵 터졌다.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 둘 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히나타는 "왜 네가 여기 있어!"라고 비명을 지른다. 원수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 둘이 한 팀이 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당연히 개판이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고, 연습 시합에서도 팀워크가 엉망이라 선배들한테 "너희 둘이 같은 코트에 서는 한 공식전 출전은 없다"는 선고까지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카게야마는 중학교 시절 '제왕'이라 불렸지만, 사실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자기중심적인 플레이, 팀원들을 도구처럼 부리는 태도. 결국 팀원들에게 버림받았다. 중학교 마지막 대회에서 카게야마가 올린 토스를, 아무도 받으러 가지 않았다. 자기 편 선수들이.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리모컨을 놓쳤다.

리더가 팀원들에게 버림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직원들과의 갈등, 소통의 실패, 그로 인한 파국을 겪어본 적이 있다. 내가 옳다고 믿었던 방식이 사실은 독선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참담함. 카게야마의 표정에서 그게 보였다.

그런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만나 변하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킨다.

히나타에게는 압도적인 신체 능력이 있다. 점프력, 반사 신경, 스피드. 하지만 기술이 없다. 배구의 기본조차 엉망이다. 반면 카게야마는 천재적인 세터지만, 혼자만의 배구를 해왔다.


이 둘이 만나서 뭘 만들어내는지 아는가.

'변인 속공(変人速攻)'이라는 괴물 같은 기술이다. 카게야마가 토스를 올리면, 히나타는 눈을 감고 전력 질주해서 점프한다. 공을 보지도 않고. 카게야마의 토스를 100퍼센트 신뢰하며 뛰어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카게야마는 히나타가 최고 높이에서 공을 칠 수 있도록 정확한 위치에 토스를 떨어뜨린다.

눈을 감고 뛰어오른다고? 누군가를 그 정도로 신뢰한다는 게 가능한가?

5화에서 이 둘이 처음으로 변인 속공을 성공시키는 장면. 나는 진짜로 소리를 질렀다.

히나타가 눈을 감고 달려가서 점프하고, 카게야마의 토스가 정확히 그 손에 떨어지고, 상대 블로커들이 반응조차 못 하는 사이에 공이 코트에 꽂힌다. 착지한 히나타의 표정. 자기가 방금 뭘 한 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쳤어?"

그 한마디에 나는 울었다. 47세 아줌마가 새벽 3시에 혼자 거실에서 고등학교 배구 애니메이션 보면서 울고 있었다.

왜 울었냐고?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신뢰에 응답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8화까지 보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카라스노 고교 배구부는 한때 전국 대회에 나갔던 강호였지만, 지금은 몰락해서 "날개가 꺾인 까마귀"라고 불린다. 거기에 천재지만 버림받은 세터 카게야마와, 아무것도 없지만 포기를 모르는 히나타가 들어왔다. 이제 뭐가 벌어질지 뻔하지 않은가.

다시 날아오르는 거다. 꺾인 날개를 펴고.


내 인생도 그랬다. 잘나가다가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또 무너지고, 또 일어서고. 그 과정의 반복이었다. 카라스노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였다. 40대 중반을 넘긴 내가 고등학교 배구 애니메이션에서 내 인생을 발견하다니.

아들에게 "하이큐 안 본다"고 했던 내가, 그날 이후 매일 밤 정주행을 시작했다.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의 늪'이 코난에서 하이큐로 옮겨간 것이다.

며칠 뒤 아침, 아들이 물었다.

"엄마, 어디까지 봤어?"

"시즌 1 끝났어."

"오, 빠르다. 어땠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냥 재밌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울었어. 많이."

아들이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엄마 성격에 히나타 완전 좋아할 것 같았거든."

맞다. 나는 히나타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없는데 포기를 모르는 그 녀석이 좋다. 키가 작아서 불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더 높이 뛰려고 하는 그 녀석이 좋다.


그리고 솔직히 인정한다. 49세인 내가, 162.8센티미터짜리 고등학생 캐릭터에게 인생의 교훈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시즌 2는 더 재밌어."

아들의 그 한마디에 나는 대답 대신 넷플릭스를 켰다.


그래, 한 편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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