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몰랐다.
넷플릭스 알고리즘이 띄워준 '명탐정 코난' 첫 화. 검은 옷의 남자들에게 수상한 약을 먹고 초등학생이 되어버린 고등학생 탐정 쿠도 신이치. 황당한 설정이었다. 말도 안 되지, 약 먹었다고 몸이 어떻게 줄어들어. 코웃음 치며 리모컨을 내려놓으려는데, 에피소드가 끝나자마자 자동재생된 2화가 시작됐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
코난의 그 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리모컨을 소파 쿠션 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새벽 2시. 나는 여전히 TV 앞에 있었다. 10화쯤 됐을까. 모리 코고로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니, 저 트릭은 생각도 못 했는데. 범인의 동기가 밝혀지는 장면에서 목이 메어왔다. 단순한 추리물이 아니었다. 각 에피소드마다 인간의 욕망과 슬픔, 분노와 후회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한 편만 더."
그 말을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했을까. 자정을 넘겼을 때 한 번, 새벽 1시에 한 번, 2시에 또 한 번.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지만,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다음 화 예고편이 나를 붙잡았다. 코난이 위기에 빠진 채 화면이 검어지면, 어떻게 다음 화를 안 볼 수 있단 말인가.
새벽 4시, 드디어 TV를 껐다. 눈이 퀭하게 부어 있었고 목은 바짝 말라 있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하느라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77년생, 마흔을 넘긴 중년의 여자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무언가에 완전히 빠져드는 느낌. 다음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느낌.
다음 날, 아니 그날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나는 넷플릭스 앱을 열었다. 어젯밤 어디까지 봤더라. 12화? 13화? 스크롤을 내리다가 화면에 뜬 숫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즌 1, 에피소드 전체 43화.
그리고 시즌은...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명탐정 코난은 1996년 1월 8일, 일본 요미우리 TV에서 첫 방영을 시작한 이래 2024년 현재까지 1,100화가 넘게 방영된 장수 애니메이션이었다. 거기에 극장판만 27편. OVA, 스페셜 에피소드까지 합치면 도대체 몇 편인지 셈조차 불가능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포기했을 것이다. 1,100화라니. 하루에 3화씩 봐도 1년이 넘게 걸리는 분량 아닌가.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재밌게 봤다"로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합리적인 판단 같은 건 저 멀리 지하철 플랫폼에 내던져버리고 있었다.
"시즌 1부터 정주행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선언한 순간, 나는 이미 늪에 발목까지 담근 상태였다는 걸 몰랐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모른 척했을 뿐.
그 후로 내 일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젯밤에 뭐까지 봤더라" 하고 되새겼다. 출근 지하철에서는 이어폰을 꽂고 한 편씩 챙겨 봤다. 신도림역에서 사당역까지 대략 20분, 딱 한 편을 보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밥을 빨리 먹고 사무실 구석에서 몰래 또 한 편. 퇴근 후에는 저녁 준비를 대충 해치우고 TV 앞에 앉았다. 설거지는 코난을 틀어놓고 했다. 범인의 대사를 놓칠까 봐 물 소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남편은 처음에 의아해했다.
"요즘 뭐 빠졌어?" "응, 코난." "코난? 그 초등학생 탐정?" "아, 그냥 재밌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은 웃어넘겼다. 아내가 가끔 만화 좀 보는 거지 뭐,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2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내가 여전히 코난을 보고 있자 슬슬 표정이 묘해졌다.
"아직도 그거 봐? 도대체 몇 편이야?" "천 편 좀 넘어." "...뭐?"
남편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내가 미쳤구나, 하는 그 눈빛. 하지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후였다.
200화를 넘기자 코난 세계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에피소드 나열이 아니라, 거대한 서사가 숨어 있었다. 검은 조직의 정체, 코난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 하이바라 아이의 비밀. 모리 란과 쿠도 신이치의 애틋한 관계. 복선이 수백 화에 걸쳐 뿌려졌다가 회수되는 쾌감은 마약 같았다. 300화에서 뿌린 떡밥이 700화에서 회수될 때면 소리를 지르며 소파 쿠션을 때렸다.
"아, 이거였어! 아오야마 고쇼 선생님, 천재 아니야?"
원작자의 이름까지 줄줄 외우게 된 건 400화쯤이었다. 아오야마 고쇼. 1963년생, 돗토리현 출신. 1994년부터 주간 소년 선데이에 명탐정 코난을 연재하기 시작해 30년이 넘도록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장인.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고, 원작 만화도 구매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으로 보던 장면을 만화로 다시 보니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500화를 넘기자 극장판에 손을 댔다. 《시한장치의 마천루》부터 《흑철의 어영》까지. 극장판은 또 다른 늪이었다. TV 시리즈와 연결되면서도 독립적인 스토리. 화려한 액션과 스케일 큰 트릭. 매년 4월 일본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극장판 개봉하면... 보러 갈 수 있으려나?'
지금 생각하면 그게 시작이었다. 한편만 더의 늪은, 결국 나를 일본어 공부로, 성지순례로, 그리고 상상도 못한 곳까지 데려가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저 오늘 밤도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 보다가 새벽을 맞이할 뿐이었다.
TV 화면에서 코난이 외쳤다.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했다.
"그래, 내 일상을 무너뜨린 범인은 바로 너야, 에도가와 코난."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마흔이 넘어 이렇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해줘서. 밤잠을 설칠 만큼 무언가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줘서.
새벽 3시, 또다시 "한 편만 더"를 되뇌며 리모컨을 움켜쥐었다. 이 늪에서 나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