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또 애니봐?"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화면을 가슴에 꼭 붙였다. 마치 사춘기 아이가 일기장을 들킨 것처럼. 고등학생 딸아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툭 던진 한마디였다.
"아니, 이거 다큐야. 다큐."
궁색한 변명이었다. 화면에는 분명 주황색 머리의 히나타 쇼요가 점프 서브를 날리고 있었으니까. 딸아이는 코웃음을 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 집의 역할이 뒤바뀐 걸까.
2023년 여름, 내 나이 마흔여섯. 딸은 입시로 머리가 복잡한 고등학생, 아들은 한창 사춘기인 중학생이었다. 그런 내가 새벽 2시까지 '명탐정 코난'을 정주행하고 있었다. 1,000화가 넘는 에피소드를 "한 편만 더"를 외치며.
처음엔 아무도 몰랐다. 남편이 출장 간 밤, 아이들이 잠든 후 거실 불을 끄고 이어폰을 꽂았다. 화면 밝기를 최대한 낮추고, 혹시 누가 일어날까 봐 문쪽을 힐끔힐끔 살피면서. 마치 10대 시절 부모님 몰래 라디오 심야 방송을 듣던 것처럼. 47년을 살면서 이렇게 뭔가를 숨겨본 적이 있었던가.
문제는 점점 대담해진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새벽에만 보던 애니메이션이 어느새 점심시간으로 침투했다. 혼자 밥 먹는 날, 김치찌개를 떠먹으며 '하이큐!!'를 틀었다. 카라스노와 아오바조사이의 인터하이 예선 경기. 히나타가 카게야마의 토스를 받아 스파이크를 꽂는 순간, 나는 숟가락을 놓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좋았어!"
텅 빈 집에 내 함성이 울렸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거구나.
그리고 그날이 왔다.
토요일 오후,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었다. 남편은 소파에서 축구를 보고, 아들은 바닥에 엎드려 휴대폰 게임을 하고, 딸아이는 식탁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나는 주방에서 과일을 깎으며 태블릿으로 '귀멸의 칼날'을 보고 있었다. 무한열차 편. 렌고쿠 쿄주로가 아카자와 싸우는 장면.
"훌쩍."
"엄마?"
"...아니, 양파 때문에."
사과를 깎고 있었다. 양파는 냉장고 안에 있었다. 딸아이의 눈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아들이 고개를 들었다.
"엄마 요즘 뭐 봐?"
"어? 그냥... 드라마."
"귀칼이잖아."
아들의 말에 온 가족의 시선이 내 태블릿으로 향했다. 화면에서는 렌고쿠가 피를 흘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마치 범행 현장에서 붙잡힌 것처럼.
"아니, 이게..."
"엄마, 그거 진도 어디야?"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중학생 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무한열차? 아 렌고쿠. 여기 진짜 울컥하지 않아?"
"너... 너도 봤어?"
"당연하지. 우리 반 애들 다 봤어. 엄마가 오히려 늦은 거야."
그날 저녁, 우리 집 거실에서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아 '귀멸의 칼날' 1화부터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마저 "그래,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건지 보자"며 합류했다.
"저기 주인공이 탄지로야. 성이 카마도고." "물 호흡 1의 형, 물면베기!" "아빠, 네즈코 귀엽지 않아?"
어느새 내가 해설을 하고 있었다. 등장인물 이름, 호흡법 종류,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까지. 입에서 술술 나왔다. 남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언제 다 외운 거야?"
"그냥... 보다 보니까."
새벽마다 몰래 본 시간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은 달라졌다.
가족 단체 카톡방의 분위기가 변했다. 예전에는 "밥 먹었어?", "몇 시에 들어와?" 같은 사무적인 메시지가 전부였다. 이제는 다르다.
"주술회전 2기 시작했대!" "아빠 스파이 패밀리 봤어요?" "엄마 프리렌 꼭 봐. 엄마 스타일임."
처음에 "엄마 또 애니봐?"라며 코웃음 치던 딸아이가 이제는 먼저 추천을 한다.
"엄마, 최애의 아이 봤어? 진짜 소름이야."
"그치? 아이 눈 진짜 무섭지?"
"엄마도 봤어?"
"응, 새벽에 다 봤어."
이제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 아니,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2024년 봄, 우리 가족은 일본 여행을 떠났다. 이번 여행의 특별한 점은 렌트카였다.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하드오프, 북오프, 만다라케. 일본 전역에 퍼져 있는 중고매장들.
"엄마, 진짜 여기 가는 거야?"
딸이 구글맵을 보며 물었다. 화면에는 외곽 도로를 따라 점점 한적해지는 경로가 떠 있었다.
"응. 여기 하드오프가 크대."
"관광은요?"
"이게 관광이야."
남편이 조수석에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조사한 매장 목록이 있었다. 교외에 있는 대형 하드오프일수록 피규어 물량이 많다는 정보까지.
첫 번째 매장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의 표정이 변했다.
창고형 건물 안에 끝없이 펼쳐진 선반들. 그리고 그 위에 빼곡히 들어찬 피규어, 아크릴 스탠드, 포스터, DVD. 아들이 먼저 뛰어갔다.
"엄마! 에반게리온 초호기 있어! 이거 단종된 건데!"
"얼마야?"
"2,000엔!"
딸도 어느새 귀멸의 칼날 코너에 가 있었다. 나는 하이큐!! 섹션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발견했다. 카라스노 전 멤버 아크릴 스탠드 세트. 박스도 깨끗하고 상태도 완벽했다. 가격표를 확인했다. 1,500엔. 한국에서 사면 3만 원은 넘을 물건이었다.
"찾았다..."
손이 떨렸다. 보물을 발굴한 고고학자가 이런 기분일까.
그날 우리는 세 군데 매장을 더 돌았다. 내비게이션에 다음 하드오프 주소를 찍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또 매장에서 보물찾기를 하고. 아이들은 지칠 줄 몰랐다. 평소 여행 중에 "힘들어", "언제 호텔 가"를 달고 사는 애들이.
"엄마, 다음 매장 언제 도착해?"
"20분 후."
"빨리 가자!"
뒷좌석에서 아이들이 전리품을 비교하고 있었다. 아들의 에반게리온, 딸의 귀멸 피규어, 내 하이큐!! 굿즈들. 남편만 빈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매장에서 남편이 뭔가를 들고 왔다.
"이거... 스파이 패밀리 아냐?"
요르 피규어였다. 남편이 쭈뼛쭈뼛 계산대로 향했다.
"아빠도 덕후 됐네."
아들의 말에 차 안이 웃음바다가 됐다.
"엄마 또 애니봐?"
이제 이 질문은 우리 집에서 비난이 아니다. 확인이다. "엄마 또 애니봐?"라는 질문 뒤에는 "나도 같이 볼래"가 숨어 있다. "뭐 재밌는 거 있어?"가 따라붙는다.
밤 11시 거실. 시험공부하던 아들이 잠깐 쉬러 나왔다가 내 옆에 앉는다.
"엄마 뭐 봐?"
"'장송의 프리렌'. 1,000년을 사는 엘프 이야기야."
"한 화만 같이 보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말수가 줄어든 아이였다. 엄마와 나란히 앉아 뭔가를 본다는 게 어색한 나이. 그런데 지금 이 아이가 내 옆에 앉아 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다리가 우리를 다시 연결하고 있었다.
"엄마 또 애니봐?"
응, 또 봐.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볼 거야.
이제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