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남편도 빠졌다 "다음 편 틀어봐"

by 코난의 서재

"여보, 나 이거 좀 봐야 돼."

토요일 저녁, 거실 TV 앞에 자리를 잡으며 나는 남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넷플릭스를 켜고 '스파이 패밀리'를 틀었다. 세 살 연상의 남편은 소파 한쪽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대꾸도 없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 혼자 애니메이션을 보고, 남편은 옆에서 주식 차트를 들여다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우리 부부의 주말 저녁은 늘 그랬다.

사실 우리 집에서 남편만 '정상'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애니메이션의 늪에 빠져 있었고, 나는 그 아이들 덕분에 뒤늦게 입덕한 케이스였다. 가족 중 유일하게 남편만 우리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아이들과 내가 캐릭터 이름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릴 때, 남편은 외계어를 듣는 표정으로 멀뚱히 앉아 있곤 했다.

"이거 진짜 재밌어. 같이 보자."

"응, 봐."

건성으로 대답하는 남편. 나는 포기하고 혼자 1화를 시작했다. 냉전 시대 동서독을 모델로 한 가상의 분단국가, 서국 웨스탈리스의 스파이 '황혼'이 동국 오스타니아로 잠입해 위장 가족을 만든다는 설정. 첫 장면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남편은 여전히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냐가 등장하는 순간, 남편의 시선이 슬쩍 TV로 향했다.

분홍색 머리의 꼬마 아냐 포저. 고아원에서 입양된 이 아이에게는 비밀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텔레파시 초능력자라는 것. 아냐가 로이드의 마음을 읽고 '아버지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남편이 피식 웃었다. 나는 못 본 척했다. 여기서 반응하면 도망간다.

"와쿠와쿠!"

아냐가 특유의 표정으로 외치는 장면. 남편이 또 웃었다. 이번엔 소리 내서.

"저 애 왜 저래?"

드디어 질문이 나왔다.

"마음을 읽을 수 있거든. 근데 아빠가 스파이인 거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스파이 놀이가 재밌으니까."

"...어린애가?"

남편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1화가 끝났다. 나는 일부러 멈췄다. 평소 같으면 바로 다음 화를 틀었겠지만, 오늘은 전략이 필요했다.

"재밌네."

남편이 먼저 말했다.

"응? 뭐가?"

시치미를 뗐다.

"저거. 스파이 패밀리. 설정이 독특하네."

"아, 그래? 난 자러 갈까 하는데."

일부러 리모컨을 소파에 던져두고 일어섰다. 남편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잠깐만. 2화만 보고 자자."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걸렸다.

2화에서는 아냐가 명문 이든 칼리지 입학시험을 보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로이드의 임무, 오퍼레이션 '올빼미'는 동국 정치인 도노반 데스몬드에게 접근하는 것. 그러려면 데스몬드의 아들이 다니는 이든 칼리지에 아냐가 입학해야 한다. 문제는 아냐가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처참하다.

남편이 빵 터졌다.

"야, 저 문제 우리 애들 초등학교 때 풀던 거잖아."

"그러니까. 귀여워 죽겠지?"

"귀엽긴 한데... 저러고 시험은 어떻게 봐?"

"그건 봐야 알지."

2화가 끝나자 남편이 스스로 다음 버튼을 눌렀다.

새벽 1시가 넘었다. 우리는 어느새 시즌 1의 절반을 넘기고 있었다. 요르가 등장하고, 이 가짜 가족이 점점 진짜 가족처럼 변해가는 과정이 펼쳐졌다.

요르 브라이어. 낮에는 바를린트 시청 공무원, 밤에는 암살 조직 '가든' 소속의 암살자 '가시공주'. 남편은 요르가 등장하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여자 예쁘네."

"...그래서 보는 거야?"

"아니, 그냥. 저 여자도 뭔가 있는 거 아니야? 너무 순수해 보여서."

남편의 예감이 맞았다. 요르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남편은 무릎을 쳤다.

"역시! 스파이 남편한테 암살자 부인이라니. 이 설정 누가 생각했어?"

"엔도 타츠야라는 작가야. 소년 점프 플러스에서 2019년부터 연재 중이고."

"인정. 천재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 3시까지 스파이 패밀리를 봤다. 다음 날 일요일, 남편이 먼저 TV를 켰다.

"이어서 보자."

오십 줄에 접어든 남편이 애니메이션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의 덕질은 나와 달랐다. 나는 감정에 몰입하는 타입이고, 남편은 분석하는 타입이었다.

"이거 봐. 로이드가 표정 관리하는 거. 진짜 프로페셔널하다."

"당연하지, 서국 최고의 스파이니까."

"근데 아냐 앞에서는 표정이 무너지잖아. 이 디테일 봐."

남편은 스파이 패밀리를 '첩보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동서 냉전 구도, 정보전의 특성, 암살자 조직의 체계까지. 나는 그냥 아냐가 귀여워서 보는 건데, 남편은 세계관을 파고들었다.

"이 작품이 냉전 시대 독일을 모델로 한 거 알아?"

"응, 대충."

"오스타니아가 동독이고 웨스탈리스가 서독이야. 이름 자체가 오스트(동쪽)랑 웨스트(서쪽)에서 따온 거고. 수도 바를린트도 베를린이잖아."

남편의 덕질 방식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같은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다른 부분에 꽂힐 수 있다니.

스파이 패밀리 이후, 남편은 다른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귀멸의 칼날을 틀자 처음엔 또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탄지로가 검술을 배우는 장면에서 남편이 물었다.

"물의 호흡이 뭐야?"

설명해줬다. 전집중 호흡법의 종류, 기본 5대 계파의 특성, 귀살대 최고 전력인 주들의 존재까지.

"오, 설정 괜찮네."

그리고 렌고쿠 쿄주로가 등장하는 무한열차 편.

남편은 귀살대의 염주 렌고쿠에게 완전히 빠졌다.

"저 사람 멋있다."

"기둥이야. 아홉 명의 주 중 하나인 염주. 화염의 호흡을 쓰지."

"표정 봐. 눈에 확신이 있어."

남편이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는 걸 처음 봤다. 스무 살 청년 렌고쿠. 아버지에게 직접 검술을 배우지 못하고 단 세 권의 지침서만으로 독학해서 주의 경지에 오른 노력파. 그리고 그 결말.

렌고쿠가 상현 3 아카자와의 사투 끝에 쓰러지는 장면. 새벽녘 불타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미소 짓는 렌고쿠. 탄지로의 절규.

"괜찮아, 울어도 돼."

내가 말했다.

"누가 울어."

남편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봤다. 남편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그날 밤, 남편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 한마디 했다.

"마음을 불태워라, 한계를 넘어서라... 좋은 대사다."

이제 우리 부부의 대화에는 애니메이션이 끼어들었다.

"여보, 오늘 회의가 너무 힘들었어."

"렌고쿠라면 어떻게 했을까?"

"...마음을 불태웠겠지."

"그래, 불태워."

농담 같지만 진심이 담긴 대화. 오십 줄 부부가 스무 살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명대사를 인용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풍경이 우스우면서도 따뜻했다.

남편은 이제 퇴근 후 넷플릭스를 켜며 묻는다.

"오늘 뭐 볼까?"

그리고 내가 새로운 작품을 추천하면 1화를 보고 판단한다. 마음에 들면 그 특유의 한마디가 나온다.

"다음 편 틀어봐."

드디어, 우리 가족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 아이들이 먼저 빠지고, 내가 따라 빠지고, 끝까지 버티던 남편마저 함락되었다. 스파이 패밀리의 가짜 가족이 진짜 가족이 되어가듯, 우리 가족도 애니메이션이라는 공통 언어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 집은 완전체가 되었다.

이전 05화엄마 또 애니봐?